[여성 1호를 만나다]<11>첫 국-공립 오케스트라 상임 지휘자 성시연 경기필 예술단장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5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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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1호 타이틀 아닌 나 자신의 음악이 뭘까 고민했던 시간들…
이 땅의 아버지들 위로하는 음악 만들고 싶어

국공립 오케스트라 첫 여성 수장인 성시연 경기필 예술단장. 성 단장은 “콘서트홀 바로 그자리에서 울려나오는 음악에 관객이 감동하고 즐거워할 때 자유롭고 행복하다”고 말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국공립 오케스트라 첫 여성 수장인 성시연 경기필 예술단장. 성 단장은 “콘서트홀 바로 그자리에서 울려나오는 음악에 관객이 감동하고 즐거워할 때 자유롭고 행복하다”고 말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콘서트홀에서 의외의 순간과 마주할 때가 있다. 명성 높은 오케스트라의 무성의한 연주. 덜 이름난 국내 교향악단이지만 진심과 노력이 전해지는 그런 연주. 성시연(38)이 이끄는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다음 연주회를 더 기대하게 만드는 악단으로 재부상하고 있다.

성시연은 올 1월 경기필 예술단장에 취임했다. 경기필은 지난해 6월 전임 단장이 단원들과의 갈등으로 사임한 뒤 성 단장이 오기까지 연주 공백이 길었다. 3월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성 단장 취임 연주회는 기대와 우려가 교차하는 무대였다. 말러 교향곡 2번 ‘부활’이 끝나자 객석에서 환호성과 함께 기립 박수가 폭풍처럼 터져 나왔다. 근래 어떤 유명한 오케스트라 연주회에서도 보지 못한 장면이었다. 한 경기필 단원은 “10년이 넘게 경기필에서 연주해 왔는데 이렇게 열광적인 반응은 처음”이라고 했다. 4월 교향악축제에서는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3층 객석과 합창석까지 관객이 빼곡히 들어찼다.

금녀의 벽 높은 지휘자들의 세계

“3월 첫 연주회는 쉽지 않은 무대였는데도 단원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연주를 했어요. 편견 없이 경기필 자체를 봐준 관객께 감사했습니다. 좋은 음반도 많고 국내 여러 오케스트라와도 비교될 만한 자리여서 부담이 컸거든요. 여러 길이 엇갈리는 교차로에 선 것 같았는데 이제 목적지를 정하고 한 방향을 향해 나아가려고요.”

성시연은 경기필 수장을 맡으면서 국공립 오케스트라 사상 첫 여성 예술단장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수많은 여성 연주자들이 음악계에서 활약하지만 지휘 분야에서만큼은 ‘금녀(禁女)의 벽’이 유독 높다.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그렇다. 지난해 12월 영국 여성 지휘자 제인 글로버가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메트)에서 데뷔했는데, 133년 메트 역사상 세 번째 여성 지휘자에 불과했다.

지휘자로서 성시연은 어딜 가나 ‘여성 1호’로 길을 만들었다. 제임스 러바인이 음악감독을 맡은 미국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에서도 137년 역사상 최초의 여성 부지휘자라는 기록을 남겼고, 서울시립교향악단에서도 첫 여성 부지휘자였다.

원래 성시연의 꿈은 피아니스트였다. 열세 살에 첫 피아노 독주회를 열었고 1994년 서울예고를 졸업한 뒤 스위스 취리히음대 피아노과에 입학했다. 1996년에는 독일 베를린 국립음대로 옮겨 시몬 라슬로, 에리히 안드레아스 교수를 사사했다. 그러다 2001년 돌연 베를린 한스아이슬러음대 지휘과에 입학한다.

음악이 전부였고 피아노는 매력적이었지만 무대에서 건반에 손을 얹으면 불안이 엄습했다. 스승인 안드레아스 교수가 “피아노 외에 다른 분야 음악도 다양하게 즐겨보라”고 조언했다. 푸르트벵글러가 런던에서 베를린필을 지휘하는 브람스 교향곡 4번 영상이 그의 방향 전환을 이끌었다. 지휘자와 단원의 혼연일체, 극한의 몰입. 지휘를 해보고 싶다는 열망이 끓어올랐다.

독학하다시피 공부해서 한스아이슬러음대 롤프 로이터 교수의 첫 여성 제자가 됐다. 하루에 3시간 이상 잠을 자본 적이 없을 정도로 악보를 파고들며 지휘봉을 다잡는 시절이었다. 파티는 물론이고 소소한 일상조차 사치라고 여겼다.

로이터 교수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는 떠오르는 태양이다. 두려워하지 말고 태양같이 세상을 비춰라.’ 2007년 4월 성시연은 말러 지휘 콩쿠르에서 1위 없는 2위를 차지한 뒤 9월 프랑크푸르트에서 독일 데뷔 연주가 잡혀 있었다. 연주회 전날 병석에 누운 스승을 만나려고 베를린으로 달려갔다. 스승이 가장 좋아하는 차이콥스키 교향곡 6번 ‘비창’을 병실에서 지휘했다. 스승이 말했다. “4악장이 정말 아름답구나. 좀 더 살아서 네가 지휘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이튿날 새벽 스승은 세상을 떠났고 성시연은 스승을 기리며 데뷔 무대에서 지휘를 했다. 지휘자로서 첫걸음을 내딛은 것이다.

음악이 두려워 칩거한 3년

보수적인 클래식 음악계에서 여성이자 동양인으로 지휘자의 삶을 사는 일이 순탄했을 리 없다. 국제 지휘 콩쿠르에서 여러 차례 입상했지만 정식 지휘자로 진출하기는 쉽지 않았다. 한 해외 오케스트라는 성시연을 객원 지휘자로 세워보라는 추천인에게 이런 답을 돌려줬다. “여성을 객원 지휘자로 초청할 수 있는 횟수가 해마다 정해져 있어서요.” 이 소식을 전하면서 추천인은 “유대인 지휘자 몇 회, 흑인 지휘자 몇 회, 이런 식으로 하지 그러느냐”고 노발대발했다.

“여성 1호라는 타이틀에 관심이 없었어요. 졸링겐 여성 지휘자 콩쿠르 우승자에게는 독일 오케스트라에서 부지휘자로 일할 수 있는 부상을 줘요. 거절했어요. 세계무대에서 남자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대결해보고 싶어서요. 그런데 보스턴 심포니에 있을 때 여성이 객원 지휘한 게 단 4번밖에 없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홍보부 직원이 ‘당신이 온 다음에 여성 지휘자가 더 자주 서더라’고 그래요. 1호가 탄생하고 길을 터야 2호, 3호가 생길 수 있겠구나, 내가 그런 역할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됐지요.”

보스턴 심포니를 거쳐 서울시향 부지휘자로 활동하면서, 그는 근래 3년 가까이 깊고 긴 슬럼프에 빠졌었다고 담담히 말했다. 그는 “국내와 해외의 환경 차이를 빨리 극복하지 못해 길을 잃고 허우적거렸다”고 했다.

“3개월간 집 밖에 나가지 않은 적도 있어요. 연주가 있을 때만 짐 싸서 나갔다가 다시 틀어박히고. 무대가 두려웠어요. 나 자신의 계발과 발전이 없었죠. 악보를 봐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어요. 악보가 예전처럼 나에게 말을 하지 않아요. 나는 음악을 위해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더이상 음악이 내게 말을 걸지 않고, 내가 음악에게 얘기하지 않으니… 죽은 세월이었죠.”

3년. 지휘자로서 그간 쌓아온 커리어가 망가질 수도 있는, 길다면 긴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는 “결코 버려진 시간이 아니었다”고 했다. 서서히 늪에서 빠져나오면서 자신이 왜 음악을 해야 하고 음악을 하면서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지, ‘투 비 유어셀프(To be yourself·너 자신이 돼라)’의 진정한 뜻이 무엇인지 깨칠 수 있었다고 말이다.

무대 위에서 완벽한 사람은 없더라

“무대에 선 사람은 100%의 사랑을 얻을 수 없어요. 무대 위의 완전체는 존재하지 않아요. 그런 욕심을 버릴 수 있었어요. 무대에 서기 전까지 열정을 가지고 열심히 하지만 지휘대에 선 순간만큼은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도록. 그런 시간이 있었기에 강해질 수 있었고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 어려움을 모른 채로 지휘가 마냥 쉬웠다면 단순히 여성 지휘자 1호라는 문자로만 남을 뿐이겠지요.”

몇 년 전부터 보아온 성시연은 자기 자랑을 잘 못하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경기필 예술단장을 맡은 뒤로는 일간지부터 여성지, 기업 사보까지 경기필 홍보팀이 미안해할 정도로 수많은 인터뷰 일정을 적극적으로 소화한다.

“나 자신의 영득을 위해 나를 PR(홍보)해 보라고 하면 여전히 어려워요. 지휘자라는 게 끊임없는 자기 PR, 자기 과시를 해야 하는 직업인데 여성 지휘자는 남자들과 달리 이런 일을 잘 못하는 것 같아요. 저도 그랬고요. 신기한 게 경기필이 좋은 환경에서 연주할 수 있게 하는 일이라면 ‘부탁드립니다’ ‘도와주세요’ 이런 말이 어디서든 절로 나와요.”

요즘 성시연의 머릿속에는 아이디어가 수시로 꽃핀다. 7월과 11월에는 시니어를 위한 콘서트를 해보려고 한다. 양복 입고 가방을 들고 걸어가는 아버지들의 애잔한 뒷모습을 위로하고, 그들에게 따뜻한 마음을 전하고 싶단다. 10월에는 일본에서 열리는 아시아 오케스트라 페스티벌에 경기필을 이끌고 참가할 예정이다.

성시연은 스위스 유학 시절 갑자기 팔에 통증이 찾아와서 한동안 피아노를 쉴 수밖에 없었다. 그때 그는 아프기 전의 나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내게 무슨 얘기를 해줄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그리고 일기장에 썼다. ‘꼬마 성시연에게. 지금처럼 연습하면 안 돼. 그리고 너는 아마 음악 없이는 살 수 없을 거야.’

2014년의 성시연에게 다시 물었다. 몇 년 전 우울하던 성시연에게 편지를 보낸다면 어떤 말을 하고 싶냐고. ‘성시연, 넌 너무 완벽하려고 하는 강박이 있는 것 같아. 100% 확실하지 않을 때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숨어버려. 상관없어, 너 자신을 다 드러내도 돼. 좀 더 떳떳해져. 그러면 사는 게 조금은 쉬워지고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거야.’

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
#성시연#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예술단장#지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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