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메트로 스케치]삭막했던 아파트촌, 160개 텃밭에 핀 ‘웃음꽃’

동아일보 입력 2014-05-15 03:00수정 2014-05-15 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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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사촌 된 서울 길음뉴타운
단지내 8년째 방치 1856m² 공터… 주민들 “건물 착공때까지 활용” 제안
6.6m²씩 분양, 상추 등 채소 심어… 어르신-아이들 북적 소통의 장으로
9일 오후 서울 성북구 길음로13길 길음뉴타운 아파트 단지 공터에서 지역 주민들이 텃밭을 가꾸고 있다. 김재영 기자 redfoot@donga.com
9일 오후 서울 성북구 길음로13길 길음뉴타운. 지하철 4호선 길음역에서 내려 끝도 없이 펼쳐진 1만2000채에 이르는 삭막한 아파트 단지가 이어진다. 그러곤 갑자기 1856m² 규모의 ‘푸른 농장’이 눈에 들어온다. 6.6m²씩 구획된 160여 개 텃밭에는 상추, 열무, 시금치, 치커리, 아욱, 쑥갓, 호박 등이 쑥쑥 자라고 있었다. 학교를 마친 아이들이 가방을 멘 채로 끊임없이 몰려들었고, 잠시 허리를 편 주민들의 얼굴에는 환한 웃음이 피어났다.

이곳에선 원래 좀처럼 창을 열고 밖을 바라보는 일도, 이웃과의 교류도 없었다. 하지만 텃밭이 생긴 뒤에는 작은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텃밭을 조성한 곳은 원래 동 커뮤니티센터가 들어설 예정이었으나 그나마 예산이 없어 2006년부터 공터로 방치돼 왔다. 출입금지 표시를 한 담장까지 쳐 분위기는 더 칙칙했다. 이에 주민들은 “참여 예산제를 통해 흙을 밟을 수 있게 텃밭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성북구는 커뮤니티센터를 착공할 때까지 텃밭을 운영하기로 하고, 지난달 10일 추첨을 통해 주민들에게 분양했다.

텃밭에는 ‘민지네 농장’ ‘우람이네 텃밭’ 등 저마다의 이름표가 달려 있다. 동에서 물조리개, 호미 등 농기구를 갖다 놔 언제든 편하게 찾아 밭을 일굴 수 있다. 밤새 쑥쑥 자라는 채소만큼이나 사람들의 이야기도 날마다 풍성해졌다.

손녀를 봐주기 위해 경남 마산에서 딸집으로 왔다는 김상순 씨(60·여)는 손녀가 어린이집에 간 틈틈이 텃밭을 가꾼다. 그는 “낯선 환경에서 아이를 돌보느라 우울증을 앓았는데 텃밭을 가꾸면서 스트레스를 훌훌 날려 버리고 있다”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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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들 사이에서도 텃밭은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방과 후에는 학원 대신 텃밭으로 달려가고 있다. 최이한 군(8)은 친구 두 집과 함께 6.6m²의 텃밭을 가꾼다. 세 친구는 틈만 나면 텃밭으로 달려와 신나게 밭에서 뒹군다. 세 장난꾸러기는 어린이날에도 놀이공원이 아니라 텃밭에서 시간을 보냈다. 이들의 부모들은 “아이들이 집을 벗어나 밖에서 충분히 뛰놀다 보니 층간소음으로 인한 갈등까지 줄어들었다”고 전했다.

김이나 씨(41·여)는 텃밭이 생기면서 이사 온 지 10년 만에 친구가 생겼다. 김 씨는 “내가 주민이라는 건 경비아저씨와 가스안전점검원만 알았을 것”이라며 “텃밭에 나와 앞 동에 사는 아주머니에게 물 주기, 비료 주기 등을 배우다 보니 금방 친구가 됐고, 잘 자란 상추로 삼겹살 파티를 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텃밭에서도 요즘 최대 화두는 ‘세월호 참사’였다. 김모 씨는 “뉴스만 보면 자식을 잃은 부모들 생각에 가슴이 아파 일부러 텃밭으로 나온다”며 “서로 얘기를 나누며 눈물을 흘리기도 하지만 흙을 만지면 그나마 위로가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하순호 길음1동장은 “텃밭이 주민들의 소통의 장이 됐다. 주민들이 열심히 키운 채소를 인근 경로당 어르신들에게 기부하는 의미 있는 활동도 추진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김재영 기자 redfoot@donga.com
#메트로 스케치#길음뉴타운#텃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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