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벌이 강혜승 기자의 엄마 도전기]<8>분만에도 인권이 있답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9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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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샌드라 스타인그래버라는 생태학자가 직접 겪은 임신과 출산 체험담을 전문지식과 함께 풀어 낸 ‘모성혁명’이라는 책이 있다. 미국에서 10년 전에 나왔다. 최근 그 책을 읽다가 깜짝 놀랐다. 저자가 출산 직전 입원해서는 의사에게 이렇게 선언하는 게 아닌가. “회음부 절개를 원하지 않아요.”

우리나라 분만실에서는 절개를 피하기 힘들다. 아이를 낳을 때 주변 피부가 심하게 찢어지지 않게 하려면 미리 5cm 정도 홈을 내야 한단다. 출산 경험자들에게 물어봐도 예외는 없었다. 가위로 잘라낸 피부가 아물 때까지 제대로 앉지도 못하고, 화장실 가는 것조차 두려운 시간을 한국의 산모들은 당연하게 여겼다.

그런데 이 ‘공포의 시술’이 필수가 아닌 선택 사항이었다니. 절개는 의사들이 아기를 받기 편하도록 산모를 눕히면서 시작됐다. 누워서 분만을 하면 중력의 도움을 받을 수 없어 회음부가 찢어질 위험이 높기 때문이다. 하지만 절개를 처음 시행한 미국에서도 1950년대부터 의사 편의적인 관행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영국 등 유럽에서는 절개 비율을 50% 이하로 줄이지 않으면 병원 평가에 불이익을 줄 정도로 부정적이다.

산모를 불편하고 거북하게 하는 것은 이뿐이 아니다. 산모들이 ‘출산 굴욕’이라 부르는 패키지가 있다. 내진, 관장, 제모 이른바 ‘3종 세트’다.

출산을 앞두고 진통을 느껴 병원에 가면 예외 없이 내진을 받는다. 자궁 입구가 얼마나 열렸는지 수시로 손을 넣어 체크하는데, 한 지인은 “레지던트로 보이는 앳된 의료진이 들락날락 내진을 했다. 정말 굴욕적이었다”고 했다. 아랫도리를 벗고 앉아 있어야 하는 진료 의자를 산모들은 ‘굴욕 의자’라 부른다.

관장과 제모도 이어진다. 장을 깨끗이 비우기 위해 좌약을 넣고, 절개와 봉합을 위해 제모를 한다. 산모들은 “누워 있다가 이유도 모른 채 봉변을 당했다”고 표현한다. 이 중 제모는 의사들 사이에서도 굳이 필요가 없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산모들은 진통과 함께 배고픔에도 시달려야 한다. 병원에서 ‘신이 내린 골반’이란 찬사를 들으며 아이를 수월하게 낳은 친구도 “아픈 것도 아픈 거지만 목마르고 배고파 실신할 지경이었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친구가 진통을 느껴 병원을 찾은 건 오전 1시. 각종 검사와 굴욕 패키지를 거쳐 오전 4시에 입원을 한 뒤론 음식은커녕 물 한잔도 입에 대지 못했다. 만일의 제왕절개 수술에 대비한 금식이었다.

친구는 “물 한 모금만”을 애원했지만, 간호사는 물 대신 링거를 팔에 꽂았다. “그날 오후 2시에 애 낳고, 이런저런 처치를 하고 오후 4시가 돼서야 밥을 먹었어. 하루 종일 쫄쫄 굶기고 힘주라는 게 말이 돼?” 그때를 생각하면 친구는 지금도 분하고 서럽다고 했다.

의사들도 산모들의 금식이 비인간적이라는 데 동의한다. 한 의사는 “유럽에서는 오히려 먹는 걸 권장한다. 사실 젖 먹던 힘까지 내야 하는 순간이다. 그런데 우리는 열 명 중 한 명 정도 수술할 가능성 때문에 산모들을 굶긴다”고 말했다.

우리나라 분만실에는 산모는 없고, 환자만 있는 형국이다. 관장, 제모, 절개, 금식 등 일련의 의료적 개입은 최대한 자연스러운 분만을 원하는 산모에게는 다 필요 없는 처치들이다. 하지만 병원에선 산모의 동의를 구하기는커녕 설명도 해 주지 않는다. 분만에 대한 철학(?)으로 의사의 처치를 거부하겠다고 하면 “모든 책임은 산모가 져야 한다”는 말을 들으며 ‘까칠한 산모’가 되는 걸 감수해야 한다.

우리는 제왕절개를 하지 않으면 무조건 자연분만이라 부르지만, 각종 의료조치가 개입되는 분만은 사실 ‘자연스럽지’ 않다. 자연 출산을 권장하는 조산사들도 “병원에서 일자로 누워 애 낳으려면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좋다”고 조언한다. 일반 병원에서는 옆으로 누워서 혹은 앉아서 애 낳는 건 꿈도 못 꿀 일이니 분만 주체인 산모의 선택권은 원천 봉쇄돼 있다.

곧 둘째아이를 낳을 또 다른 친구는 첫째 때의 악몽을 되풀이하기 싫다고 했다. 특히 진통실에서 몇 시간을 꼼짝없이 누워 기다리는 게 힘들었단다. 커튼 사이로 들려오는 다른 산모들의 비명 소리는 친구를 벌벌 떨게 했다. 분만실에서도 악몽은 계속됐다. 분만대에 다리를 올린 채 눕혀져 ‘의사 선생님이 오시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10여 분이 흘렀을까. 마침내 오신 선생님과 간호사들은 “어머∼ 오늘 선생님 의상 좋은데요∼”라며 잡담을 나눴다. 친구는 순간 “이렇게 누워 있지만 정신은 멀쩡하다고요!”라며 소리를 지를 뻔했단다. 하긴 대학병원에서는 산모 동의도 받지 않고 수련의들에게 분만 과정을 참관시키니, 병원엔 의사만 있고 산모는 없는 셈이다.

요즘엔 분만에도 ‘인권’이 있다며 ‘인권 분만’이란 말도 나온다. 특별한 게 아니다. 눈이 부시도록 밝은 조명을 어둡게 조절하고, 산모가 편안한 자세에서 산통을 이겨 내도록 도와주고 갓 태어난 아기를 엄마와 충분히 교감하게 시간을 주는 세심한 배려다.

강혜승 기자
강혜승 기자
인권분만연구회 김상현 회장(동원산부인과 원장)은 “우리의 분만 환경은 빨리빨리 많은 환자를 받으려는 병원과 고압적인 의사 중심”이라고 꼬집는다.

하지만 ‘분만 인권’을 찾겠다는 산모들의 도전은 주저앉을 공산이 크다. 일반 병원에선 2박 3일 입원에 70만 원이면 되지만, 자연스러운 분만을 최대한 배려해 주는 병원들은 두 배를 받는다. 의료급여수가에서 누워서 낳는 ‘정상 분만(normal delivery)’과 ‘제왕절개’ 두 가지만 인정하고 다른 분만법은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저출산의 그늘은 분만대 위까지 드리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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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승 기자 fineday@donga.com
#분만#임신#체험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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