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isure]왕궁냄새 나는 마니산 참성단,토속적인 태백산 천제단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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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덮인 태백산 천제단. 등산객들이 눈보라를 피하고 있다.
눈 덮인 태백산 천제단. 등산객들이 눈보라를 피하고 있다.
한민족은 ‘하늘의 자손’이다. 민족의 시조 단군 할아버지가 그 단적인 예다. 시월상달에 하늘에 제사를 지냈던 풍습도 마찬가지다. 부족국가시대 고구려 동맹, 부여 영고, 동예 무천 등이 그렇다.

하늘의 제사는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이 안성맞춤이다. 태백산 천제단, 강화 마니산 참성단, 북한 구월산 천제단은 그러한 흔적이다. 산꼭대기에 제단을 만들고 제물을 바쳤다. 참성단의 한자 ‘塹城’은 ‘성을 파서 제단을 만들었다’는 뜻이다.

태백산 천제단(天祭壇)과 강화 마니산 참성단은 뭐가 다를까. 둘 다 모두 하늘에 제사를 지냈던 곳임은 틀림없다. 하지만 시대에 따라 미묘한 차이가 나타난다.

신라시대 태백산 천제단에선 천신 즉 단군과 산신을 아울러 모시다가, 불교국가인 고려시대엔 태백산 신령을 주로 모셨다. 유교국가 조선 전기엔 산신도 빠지고, ‘천왕(天王)’을 모셨다. ‘신(神)’이 ‘왕(王)’으로 격하된 것이다. 하지만 임진왜란(1592년) 이후 다시 ‘천신(天神)’으로 직위가 올라갔다. 나라가 바람 앞 등불 같은 신세가 되자, 단군 할아버지의 도움이 절실했던 것이다.

제사를 맡은 제관(祭官)도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태백산 천제단은 신라 땐 왕, 고려 땐 국가가 파견한 관리가 주도했다. 하지만 조선시대엔 그 지방의 구실아치나 백성이 주가 되어 제사를 지냈다. 이에 비해 강화도 참성단은 신라 고려 조선시대까지 줄곧 국가 관리들이 제사를 맡았다. 각종 제사비용을 위해 별도의 땅 즉 ‘제전(祭田)’까지 내려줄 정도였다. 제상에 올리는 제수(祭需)도 차이가 있다. 태백산 천제단에선 조선시대 소와 삼베를 주로 올렸다. 요즘도 쇠머리와 삼베를 올린다. 또한 소, 삼베, 백설기를 빼곤 모든 제수용품은 날것 즉 생(生)으로 올렸다. 참성단에선 우리 눈에 익은 술, 떡, 탕, 차 등을 올렸다.

태백산 천제단은 토속적이고, 마니산 참성단은 왕궁 냄새가 난다. 천제단이 백성의 자발적 기도처라면, 참성단은 국가의 공식 제천의례 장소였다. 천제단이 정상 부근에 3곳이나 이어져 있다는 것도 이것과 무관하지 않다. 너도나도 봉우리마다 돌로 제단을 쌓아 제사를 지낸 것이다.

참성단이 있는 마니산은 백두산과 한라산의 중간지점에 있다. ‘한반도의 명치’이다. 명치가 막히면 사람은 기가 막혀 살 수 없다. 명치가 뻥 뚫려야 두루두루 잘된다. 천제단이 있는 태백산도 백두산과 한라산의 중간에 있다. 한반도 척추인 백두대간의 급소이다. 허리뼈가 곧추서야 똑바로 걸을 수 있다. 마니산 참성단과 태백산 천제단은 사람의 치명적인 혈처인 것이다.

태백산 천제단의 토속화는 일제강점기에 더욱 두드러진다. 동학 등 신흥종교들이 ‘민족의 종산(宗山)’으로 떠받들며 그 아래로 모여든 것이다. 의병들은 천제단에서 ‘독립기원제’를 지냈다. 태백산 자락 아래 식민지 백성들은 너도나도 정화수를 떠놓고 치성을 드렸다. 이것이 오늘날 민간신앙의 성지로 이어졌다. 요즘도 태백산 주위 곳곳엔 자생적 촛불치성 기도소가 많다. 산불을 막아야 하는 산림청으로선 늘 가슴이 조마조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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