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60년, 참전 16개국을 가다]<19>현지 취재기자 가슴 울린 참전 용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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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6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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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전 참상… 60년간의 고통… 노병들의 큰 희생 감사합니다

총상도 훈장도 자랑거리… 한국 발전상에 찬사 보내
낯선 땅서 받은 충격으로 평생 고난의 삶 살기도
극심한 생활고에 훈장 팔아… 해외원조, 참전국 우선을

동아일보 이유종 기자가 올해 3월 초 터키 앙카라에 있는 터키참전용사회 사무실에서 참전용사들과 만나 6·25전쟁 당시 터키군의 활약상을 취재하고 있다. 사진 제공 주터키 한국대사관
동아일보 이유종 기자가 올해 3월 초 터키 앙카라에 있는 터키참전용사회 사무실에서 참전용사들과 만나 6·25전쟁 당시 터키군의 활약상을 취재하고 있다. 사진 제공 주터키 한국대사관
《동아일보는 올해 2월부터 지난주까지 18회에 걸쳐 ‘6·25 60년, 참전 16개국을 가다’ 시리즈를 연재했다. 동아일보 기자들은 6·25전쟁 참전 16개국을 방문해 생의 마감을 앞둔 노병들을 만나 60년 전의 전쟁을 더듬으며 한국의 오늘과 미래를 얘기했다. 그들은 또 가슴 한쪽에 묻어뒀던 삶과 죽음의 현장에 대한 기억에 아파하고 있었다. 하지만 잿더미 속의 한국이 일어서는 것을 도왔다는 자부심으로 한국에 대한 무조건적인 애정을 보여줬다. 때론 잊혀져 가는 참전의 기억을 아쉬워했다. 기자들의 취재 뒷얘기를 정리했다.》
▼팔 잃었지만 자랑스러워 안감춰

벨기에의 참전용사 마르셀 샤네 씨는 1953년 잣골전투에서 왼팔을 잃었다. 그는 “일부러 지난 57년 동안 의수(義手)를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한국전쟁 참전이 자랑스럽기 때문에 감출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르네 베르 씨는 “내가 지금 한국전쟁 당시처럼 스물두 살이라면 당연히 다시 참전할 것이다. 왜냐고? 자유를 위해 싸우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당연한 의무이기 때문이다. 아프가니스탄에 파병하는 한국도 수십 년이 지난 훗날에는 똑같은 느낌을 가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노령인 탓에 저음으로 천천히 말을 이어갔는데, 이 말을 할 때만큼은 매우 단호하면서 힘이 넘쳐 보였다. 이번 취재를 통해 ‘남의 나라 일’처럼 여겼던 6·25전쟁과 마주 앉은 느낌을 받았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악몽같은 기억… 참전 후회 안해

콜롬비아에서 만난 상이용사 호세 미겔 토레도 씨는 군복무를 마친 상태에서 6·25전쟁 발발 소식을 듣고 다시 한국행을 자원했다. 학업을 포기한 채 자원입대한 참전용사들도 수두룩했다.
‘잘 알지도 못하는 나라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켜주는 게 그 나이에 그렇게 중요했느냐’는 질문을 던지곤 했지만 우문(愚問)이었다. “민주주의가 침공을 당했다는 데 분노를 느꼈고, 피 끓는 나이여서 정의를 위한 모험의 열망이 컸다”는 대답이 많았다. 악몽 같은 기억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한국행을 후회한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만약 한국이 전쟁 후 실패한 국가의 길을 겪었다면 지금 참전용사들이 자신의 한국행 선택에 대해 부여하는 자기평가도 달라지지 않았을까.

이기홍 기자 sechepa@donga.com


피 나눈 형제… 교류 확대되길

터키의 앙카라와 이스탄불에서 만난 참전 노병들은 한결같이 한국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전장에서 다리를 잃은 상이용사조차도 6·25전쟁 참전 사실을 무척 자랑스러워했다. 그들은 “2002년 월드컵 당시 한국과 터키는 3-4위전을 치렀다. 비록 한국과 터키는 축구로 경쟁했지만 역시 피를 나눈 형제였다. 그래서 서로를 축하하고 위로했다”고 입을 모았다. 그러면서도 “한국 젊은이들은 우리에게 감사하지 않고, 터키 젊은이들도 양국이 한때 그토록 가까웠다는 사실을 모른다”며 양국의 다음 세대가 6·25전쟁이 만들어준 우의를 잊어가는 것을 아쉬워했다. 이들은 전장에서 피를 흘리며 맺은 두 나라의 인연이 경제 산업 문화 등 전 분야에 걸친 교류와 협력으로 확대되기를 진심으로 기대했다.

이유종 기자 pen@donga.com
폐허 딛고 번화한 도시 세워 놀라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만난 참전용사들은 한결같이 “잊지 않고 찾아줘 고맙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6·25전쟁에 참전한 남아공 공군은 모두 백인이었는데, 1994년 흑인 정권으로 바뀌면서 6·25 참전이 ‘백인의 역사’로 폄하되어 잊혀지고 있다고 하소연하기도 했다. 2002년 월드컵을 기억하는 참전용사들도 많았다. 당시 월드컵 기간에 서울을 방문했던 참전용사들은 “폐허였던 땅이 번화한 도시로 발전한 모습에 놀랐고, 그 넓은 도로를 가득 채운 (붉은악마의) 붉은 물결에 놀랐다”고 말했다. 고인이 된 한 참전용사의 부인은 “한국과 달리 요하네스버그나 프리토리아는 치안이 불안해 낮에도 함부로 돌아다닐 수 없는데, 월드컵을 무사히 치를 수 있을지 걱정”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황장석 기자 surono@donga.com
취재기자 손자 맞듯이 반겨
뉴질랜드 웰링턴과 오클랜드에서 두 번의 참전용사 간담회를 진행하면서 인사말을 할 기회가 있었다. “저는 1970년생입니다. 여러분들이 피와 땀을 흘린 덕분에 자유롭고 부강한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이렇게 기자가 되어 취재하러 올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노병들은 오랜만에 아들이나 손자를 만난 것처럼 감격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각자가 가진 전쟁의 기억과 경험은 물론이고 각종 사진과 문헌 등 오랜 세월 보관해 온 자료들을 꺼내놓았다. 이들은 한국이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이뤄내는 것을 보면서 큰 보람을 느꼈다고 했다. 한국 교포로는 최초로 뉴질랜드 국회의원이 된 멜리사 리 씨는 “참전용사 모두가 나를 딸과 손녀처럼 응원해 줬다”고 말했다.

신석호 기자 kyle@donga.com
한국은 나의 두번째 조국

올해 2월 프랑스 파리에서 참전용사들을 만났을 때 한국전쟁참전용사회 전체 회원의 절반인 16명이 부부동반으로 나왔다. 그들은 동아일보 기자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았고, 들고 온 자료도 가지가지였다. 그래서 인터뷰를 진행한 4시간이 부족할 정도였다. 레몽 벤나르 씨 부부는 주말이면 불고기와 김치로 외식을 한다고 했다. 피에르 마비요 씨는 “한국은 프랑스에 이어 나의 두 번째 조국”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26일 유엔군이 중공군을 처음으로 꺾은 ‘지평리 전투’ 재연 행사가 경기 양평군에서 열렸을 때 벤나르 씨 부부 등 파리에서 만난 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2월에 만났던 기자를 또 본다”며 너무 반가워하는 그들의 모습이 아직도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조수진 기자 jin0619@donga.com
한국을 성공한 자식처럼 여겨

태국 방콕 교외에서 만난 참전용사 30여 명이 한국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그들의 말에 듣기도 전에 표정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교통편이 어긋나면서 1시간이나 지각했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60년 전 이야기’에 관심을 둔 한국 기자를 박수로 맞이해 줬다. 연방 흐르는 땀을 닦으면서도 준비해 온 메모와 사진첩을 보여주며 하나라도 더 들려주고 싶어 했다. 그들의 얘기를 모두 듣지 못한 채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떠나야 했던 기자에게 그들은 과일 한두 개를 쥐여주며 등을 두드려줬다. 참전용사들은 한국을 마치 ‘자식 같은 나라’로 생각하고 있었다. 경제적으로 한국이 크게 성장했지만 노병들은 한국을 ‘어려운 부모 곁을 떠난 뒤 성공한 대견스러운 아들딸’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박민혁 기자 mhpark@donga.com


눈앞서 친구 잃은 얘기하며 눈물

미국 인디애나 주에서 만난 스탠 밴더 씨는 다리에 총상을 입었다고 했고 이마를 스치고 간 총알자국도 보여줬다. 그 노병은 “(1950년 9월) 서울을 수복한 뒤 총격전 와중에 친한 친구가 내 눈앞에서 총에 맞아 죽었다. 눈물을 펑펑 쏟았다. 나 역시 총으로 누군가를 처음으로 죽였다. 견딜 수 없는 감정에 심하게 토했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 그는 “어느 순간부터 적군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면서 젊은 시절 경험한 밑바닥 감정을 털어놓았다. 오랫동안 묻어뒀던 잊고 싶은 기억을 헤집어 내는 참전용사들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취재를 하면서 ‘만약 내가 같은 나이에 그런 충격적 경험을 했다면?’ 하고 되물을 때가 많았다. 그들은 낯선 코리아에 와서 영혼에 큰 상처를 입고 돌아갔다.

김승련 기자 srkim@donga.com


아리랑 가사 지금도 못 잊어

그리스군의 수송기 조종사로 참전했던 아크리보스 촐라키스 씨는 한국군 장교의 눈을 감겨준 일을 잊지 못했다. 머리에 심한 부상을 당해 수송기로 실려 온 한국군 장교는 눈이 한쪽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다. 그 장교는 촐라키스 씨를 보고는 마지막 힘을 다해 권총을 뽑으면서 “당신한테 이걸 주겠다”고 말했다. 통역으로부터 그 말을 듣고는 의미를 짐작했다. 그는 그 총의 방아쇠를 가만히 당겼다. 촐라키스 씨는 “한국에 스무 살 청년으로 갔는데, 스물두 살 할아버지가 돼 돌아왔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수송기 사고로 죽을 고비를 두 번이나 넘겼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지금도 ‘아리랑’ 가사를 잊지 않고 있다는 그는 “내 삶의 절반은 한국에 남겨두고 왔다”고 말했다.

고기정 기자 koh@donga.com


‘다시 참전하겠나’ 묻자 묵묵부답

전쟁이 병사들에게 미친 심리적 충격은 평생의 짐이었다. 영국군으로 참전했다가 포로로 잡혔던 테드 로즈 씨는 ‘포로 생활이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느냐’는 질문에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다시 당시로 돌아간다면 참전하겠느냐’는 질문에는 아예 못 들은 듯 외면했다. 이런 질문을 하는 기자로서의 책무가 원망스러웠다. 잭 사이크스 씨도 355고지에서 포탄 파편에 맞아 오른팔 신경이 모두 죽었고 15년 전 여름부터는 공황장애를 겪었다고 했다. 한곳에 머물 수 없어 늘 움직여야 했고 어둠이 싫어 셔츠도 입지 않고 밖으로 뛰쳐나간 적도 있다고 했다. 존 볼러 씨는 폭죽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 “진격, 앞으로!”라고 소리를 치기도 했다고 한다. 이들에겐 6·25 참전은 악몽이기도 했다.

이재명 기자 egija@donga.com

뇌리에서 참상 안떠나 평생 괴로워

캐나다 오타와에서 만난 빌 베리 예비역 소령은 참전 이후 정신의 황폐화를 겪었다. 그는 철원계곡에서 자신을 도왔던 18세의 한국인 ‘킴’이 중공군의 포탄에 스러지는 장면을 목도하면서 그에 대한 죄책감을 평생 떨치지 못한 채 살고 있었다. 2인 1조로 생사를 같이했던 단짝 전우 존이 귀국한 후 자살한 일도 큰 충격이었다. 한국을 떠난 뒤에도 전쟁터에 널브러진 적군의 시체더미 잔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싸움판에 빠져드는 등 스스로 망가져갔다. 하지만 아무도 그가 겪은 참혹한 삶을 알지 못했다. 18세 때 낯선 나라를 위해 싸운 후유증은 평생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다. 60년 전 우리가 기억도 못하는 어린 병사의 희생 위에 오늘의 한국이 서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최영해 기자 yhchoi65@donga.com

남은 건 빛나지 않는 명예와 기억

에티오피아 참전용사들은 혁명으로 정치가 뒤바뀌면서 박해받고 신음해야 했다. 참전 당시 대부분 황제 근위대 소속이던 이들은 1974년 쿠데타로 들어선 사회주의 정권에 박해받았다. 대부분 강제 예편됐고, 일부는 재산도 몰수당했다. 마이클 베다다 씨는 가로세로 4m도 안 되는 방에서 여섯 식구가 살고 있었다. 그는 “(참전 후 돌아와)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누구도 나를 고용하려 하지 않았다”며 이웃의 도움으로 연명했다고 했다. 마을 시장에서 생계가 곤란한 참전용사들이 무공훈장들을 내다파는 것도 목격했다. 이들에게 남은 것은 그다지 빛나지 않는 ‘명예’와 ‘기억’뿐이었다. 한국을 도운 사람에게 합당한 보답을 하는 일은 어떤 외교정책보다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유성운 기자 polaris@donga.com
기사 나간후 사망소식에 안타까워

4월 필리핀에서 만난 85세의 6·25 참전용사 마리아노 파뮬레라스 씨는 5월 초에 유명을 달리했다. 그에 대한 기사가 나간 지난달 11일 안부가 궁금해 전화를 걸었다가 이틀 전 사망하셨다는 비보를 접했다. 거동이 불편해 휠체어에 탄 채 북한군 장군의 호위병 역할을 했던 기이한 포로 생활 얘기를 들려주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당시 파뮬레라스 씨는 한국 초청 행사에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며 들떠 있었다. 필리핀을 찾기 2주 전쯤에는 참전협회장이었던 빅토리노 아자다 예비역 대령이 세상을 떠나기도 했다. 그는 380쪽짜리 6·25 관련 책을 펴내는 등 참전용사들에겐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고 들었다. 좀 더 일찍 이들이 건강한 모습이었을 때 찾아가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면 좋았을 텐데….

류원식 기자 rews@donga.com

남편 전사후 한국 마니아로 60년

호주 시드니에서 만난 올윈 그린 여사는 갓 결혼한 남편이 한국에서 전사했지만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다. 내가 예상했던 ‘한 맺힌 삶’과는 딴판이었다. 그는 “한국인은 우리에게 늘 고마워한다”며 한국 행사만 열리면 남편의 훈장을 주렁주렁 달고 나오는 ‘한국 마니아’가 됐다. 참전용사들은 지난 60년간 한국을 위한 ‘보이지 않는 응원자’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생을 정리하는 단계에 와 있다. 결국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싸웠던 나라라는 이유로 한국에 애정을 갖는 2, 3세대가 연결고리가 될 것이다. 한국의 해외 원조금 지원대상에서 참전국을 가장 우선순위에 놓고 장학지원사업 초청행사 등 다각적인 대안을 마련해야 할 때다.

김영식 기자 spe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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