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화제! 이사람]중국교포 3세 방인주 씨의 ‘태권 일기’

  • 입력 2009년 5월 19일 02시 55분


태권도 전도사 방인주 씨가 13일 오후 국기원 시범단 ‘태권도 문화 공연’ 도중 시원한 발차기를 선보이고 있다. 서울 종로구 경희궁에서 펼쳐진 이날 공연에서 방 씨는 도약 발차기와 격파 등으로 감탄사를 자아냈다. 양종구 기자
태권도 전도사 방인주 씨가 13일 오후 국기원 시범단 ‘태권도 문화 공연’ 도중 시원한 발차기를 선보이고 있다. 서울 종로구 경희궁에서 펼쳐진 이날 공연에서 방 씨는 도약 발차기와 격파 등으로 감탄사를 자아냈다. 양종구 기자
“발차기 16년…태권도는 나의 종교”

1994년 무더운 여름날. 중국 베이징(北京)에 사는 9세 꼬마가 다니는 학교에 태권도 동아리가 생겼다. 새하얀 도복에 반한 꼬마. 도복이 입고 싶어 동아리에 가입했다. 태권도는 꼬마와 찰떡궁합이었다. 배운 지 얼마 안 돼 전국겨루기대회에서 2등을 했다. 꼬마는 욕심이 났다. ‘태권도를 제대로 배워야겠다’고 마음먹었다.

2002년 칼바람 불던 겨울날. 꼬마는 고등학생이 됐다. 한국인 사범에게서 태권도를 배우던 그에게 시련이 닥쳤다. 겨루기 도중 허리를 크게 다쳤다. 허리 부상으로 2년 동안 도복을 입지 못했다. ‘태권도가 내 길이 아닌가. 그만둬야 하는 건가’라며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2004년 화창한 봄. 건강을 회복한 그의 머릿속엔 온통 태권도뿐이었다. 공부한다고 펜을 잡았지만 꿈속에선 도복을 입은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결심했다. “태권도의 고향인 한국으로 가자. 거기서 내 인생을 걸자.”

그해 여름 그렇게 한국에 왔다. 의욕은 넘쳤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았다. 중국에서 태어나 중국인들과 함께 살아온 그에게 한국 땅은 낯설기만 했다. 한국말은 너무 어려웠지만 죽기 살기로 가나다를 익혔다. 한국 친구도 사귀고 잠자는 시간까지 쪼개며 태권도 연습을 했다.

2005년 1월 마침내 기다리던 소식이 왔다. 태권도 명문 한국체육대 태권도학과 입학통지서를 받았다. 외국인 대학수학능력시험, 태권도 경력 검증, 면접 등을 거쳐 손에 쥔 값진 결과물이었다. 입학통지서를 받는 순간 중국에 계신 부모님 생각에 눈물을 흘렸다.

대학생 시절은 꿈만 같았다. 좋아하는 태권도에 푹 빠져 지냈다. 여자 친구도 생겼다. 방학 땐 중국에 있는 친구들을 만나 태권도 시범을 보여 줬다. 중국 친구들이 감탄사를 내뱉을 땐 뿌듯함을 느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보여주고, 그걸 사람들이 좋아하니 행복해요.”

그리고 2007년 말 마침내 꿈을 이뤘다. 10 대 1이 넘는 경쟁률을 뚫고 국기원 시범단에 뽑혔다. 국기원 시범단은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태권도 선수들이 모이는 태권도의 메이저리그. 4년의 도전 끝에 시범단원이 됐다. 태권도를 처음 배울 때부터의 모든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떠올랐다.

중국교포 3세 방인주 씨(24) 얘기다. 중국 지린(吉林) 성 자오허(蛟河) 시에서 태어난 방 씨는 온화한 눈빛에 수줍은 미소를 가진 청년. 그러나 태권도 얘기만 나오면 눈빛이 달라진다. “태권도를 통해 할아버지 고향을 알았고 제 인생이 결정됐어요. 도복을 입으면 진지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올해 대학원에 입학한 그는 학업을 마치면 중국으로 돌아갈 계획이다. 한국 생활에 이제 막 익숙해진 그가 또 다른 모험을 준비하는 이유는 한 가지. 태권도 전도사가 되고 싶어서다. “주변에서 귀화를 권할 때마다 마음이 흔들리죠. 하지만 중국 국적이 있어야 중국인들에게 다가설 수 있어요. 국적은 중국이지만 마음만은 태권도의 고향에 있을 겁니다.”

그의 ‘태권일기’는 현재진행형이다. 중국에선 홀로 시범을 보여야 하기에 혼자 할 수 있는 동작을 연마한다. 태권도 도장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태권도 사범 예행연습도 하고 있다.

새로운 도전에 대한 두려움은 없을까. 그는 빙긋 웃더니 이렇게 말했다. “어차피 태권도만 믿고 여기까지 왔어요. 태권도가 제 종교인데 계속 믿어야죠.”

신진우 기자 nicesh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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