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 100년-위안의 詩]황규관 ‘예감’

  • 입력 2008년 12월 5일 03시 00분


‘폐허’ ‘패배’ ‘실패’ 등의 단어는 발성법 자체에도 균열과 하강의 기운이 스며 있다. 파열음과 마찰음으로 이루어진 이 단어들은, 소리들이 서로 부딪쳐 침전하며 서둘러 끝을 맺는 형태로 발음된다. 이 ‘패배적인’ 발성법을 세상 가득 울려 퍼지는 ‘노래’의 정반대 차원으로 바꾸어 놓은 시인이 있다. ‘패배는 나의 힘’이라는 시적 슬로건을 삶과 시의 행동강령으로 삼고 있는 황규관이 그이다.

‘예감’은 최근 우리의 어려운 경제상황과 직결되어 더 진한 실감을 안겨준다. 전 세계를 점령한 거대 자본의 위력은 사람들의 ‘밥벌이’를 점점 더 가혹한 투쟁의 행위로 만들고 있다. 밥벌이의 전쟁터가 된 도시에는 사랑이 깃들 공간조차 사라져, 이제 ‘사랑의 노래’는 곧 철거될 재개발 지역의 허름한 주점에서나 부를 수 있게 되었다. 궁핍한 생활에 지친 처자식의 신음은 지금의 ‘가난한 평화’가 얼마나 아슬아슬한 것인가를 날마다 일깨우며 가장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다.

그러나 황규관은, 삶에 패배한 이 순간이 바로 노래가 터져 나오는 순간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노래’는 ‘나’를 압박해 오는 혹독한 삶의 무게를 “내 것으로 한 다음에”야 터져 나오는 것이다. ‘노래’는 막바지에 이른 ‘나’의 사랑과 외로움을 전심전력으로 ‘울’며 터뜨리는 자기 갱신의 행위인 것이다. 그 순간에 ‘노래’는 비로소 세상을 향해 울려 퍼지는 것이다. ‘백척간두’를 ‘힘’으로 삼는 놀라운 역전의 비밀, ‘폐허’와 ‘폐허의 아침까지’를 울며 노래할 수 있는 의지의 비밀이 여기에 있다. 고단하고 지친 그대여, 황규관이 선창하는 ‘노래’에, 조만간 그대 스스로 터뜨리게 될 노래의 ‘예감’에 함께 젖어들지 않으시려는가.

김수이 문학평론가·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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