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쉬는 조선왕릉]<10·끝>과거와 현재의 만남

  • 입력 2008년 10월 8일 02시 4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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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릉 40기서 해마다 제사

유-무형 유산 ‘귀중한 소통’

조선 왕릉의 정자각 서쪽 앞. 봉분으로 이어지는 푸른 언덕인 사초지(莎草地)가 시작되는 곳에 있는 낯선 석조물. 땅 위에 평균 1m의 기다란 화강암을 정사각형 모양으로 이어 놓았다. 정사각형 내부는 땅을 파 깊숙하다.

조선 왕릉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예감(예坎)이다. 한자 그대로 풀이하면 ‘묻는 구덩이’. 무엇을 묻었을까. 예감의 또 다른 이름인 망료위(望燎位)로 그 쓰임새를 추적해 보자.

망료는 제사 때 선대왕의 평안을 기원하며 읽은 축문(祝文)을 제사가 끝난 뒤 태우는 과정을 지켜보는 일을 뜻한다. 예감은 정자각 서쪽에 위치해 있다. 제향 공간인 정자각은 동쪽 방향이 정면인데 제향은 정자각 동쪽에서 시작해 서쪽에서 끝났을 것이다. 예감은 제사가 끝난 뒤 축문을 태우고 땅에 묻었던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예감 위에 소나무로 만든 뚜껑을 덮어 놓았지만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예감의 진짜 가치는 과거에 축문을 ‘태워 묻었던’ 곳이 아니라 지금도 축문을 ‘태우고 묻는’ 곳이라는 데 있다. 왕과 왕비가 합장된 경우 등을 포함해 조선 왕릉 40기에서 모두 제향이 열리고 있는 것이다. 태조부터 순종까지 조선 600년의 1∼27대 모든 왕과 왕비를 위한 제향 의식이 기일마다 열리고 있다. 건원릉은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이, 다른 곳은 왕릉마다 봉향회가 제향을 주관한다. 매년 6월 27일 열리는 건원릉 제향에는 1500여 명이, 다른 왕릉에는 300∼500여 명씩 참가한다. 이렇듯 해마다 수십 차례씩 소프트웨어(무형유산)와 하드웨어(유형유산)가 만나 조선 왕릉의 가치를 완성하고 있는 셈이다.

제향날에 왕은 홍살문에서 참도를 통해 정자각까지 걸어간다. 평소 정자각은 기둥마다 신렴(神簾)이라 불리는 일종의 ‘커튼’을 쳐놓았다가 제향날 걷어 올렸다. 유일하게 남아 있는 신렴은 2006년 원종(인조의 아버지) 능인 장릉(경기 김포시)에서 발견된 것으로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왕은 선대왕에게 첫 잔을 올리는 초헌관(初獻官) 역할을 맡는다. 두 번째 잔을 올리는 아헌관(亞獻官)은 영의정이, 마지막 잔을 올리는 종헌관(終獻官)은 좌의정이 한다. 올해 건원릉 제향에서는 태조 600주기를 맞아 의친왕의 손자인 이원 전주이씨대동종약원 총재가 직접 초헌관을 맡았다.

초헌관이 정자각 동쪽의 계단을 오른다. 정자각의 절하는 공간 배전(拜殿)에서 헌관(제사에서 잔을 올리는 사람)들은 항상 서쪽을 봐야 한다. 제상(祭床)을 차린 정전(正殿)에는 문이 3개 있는데, 출입문처럼 보이는 중앙 문은 제향 때 쓰이지 않는다. 헌관은 동쪽 문으로 들어가 서쪽 문으로 나온다. 시작을 뜻하는 동쪽과 끝을 뜻하는 서쪽의 원리를 간직한 동입서출(東入西出) 원칙을 철저히 지키는 것이다.

왕릉 제향은 왕이 승하한 지 3년 뒤 올리기 시작했다. 왕이 세상을 떠나고 왕릉이 조성되려면 5개월의 시간이 걸렸다. 이 기간 동안 창덕궁에 임시 건축물을 만들어 시신을 안치했는데, 부패를 막기 위해 동빙고에서 가져온 얼음으로 ‘침대’를 만들었다. 시신은 왕릉 석실에 자리할 때까지도 세상을 떠날 때 모습 그대로였다고 한다.

의친왕의 손자인 이혜원 국립고궁박물관 연구자문위원은 말한다. “중국은 명, 청 시대 황릉의 웅장함을 자랑하지만 제향의 전통을 상실한 ‘옛 유적’일 뿐이다. 조선 왕릉은 애초의 기능을 잃은 박제된 문화유산이 아니라 현재적 공간이다. 과거와 현재를 이어 살아 숨쉬게 만든 유산은 조선 왕릉뿐이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 연재에 도움말 주신 분들

김기덕 건국대 교수, 김두규 우석대 교수, 김상협 박사, 김이순 홍익대 교수, 목을수 전 융건릉관리소장, 박동석 문화재청 사무관, 은광준 조선왕릉연구소장, 이선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 이영 경원대 교수, 이창환 상지영서대 교수, 이혜원 국립고궁박물관 연구자문위원, 최종희 배재대 교수, 각 왕릉관리소장(가나다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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