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50대, 2006년의 초상]<4>가난한 문화생활

입력 2006-11-20 03:04수정 2009-10-07 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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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에 쫓겨서, 아이들 키우느라, 지금껏 50대에게 ‘문화’는 자연스러운 생활의 일부분이 아니라 ‘사치’였다. 그러다보니 시간이 남아도 어떻게 즐겨야 할지 모르는 ‘놀이문맹’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최근 50대는 문화 소비의 새로운 주역으로 떠오르고 있다. 주말인 18일 연극 ‘늙은 부부의 이야기’를 보기 위해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아트홀을 찾은 안두환(51·장학사) 오남옥(50·교사) 씨 부부. 이훈구 기자
눈을 뜨자마자 시계부터 살핀다. 오전 다섯 시.

대기업에서 명예퇴직한 뒤 납품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박준열(54·서울 송파구 거여동) 씨는 쉬는 날인 토요일에도 어김없이 이 시간이면 눈이 떠지는 생체리듬이 야속하기만 하다.

잠옷 바지 속으로 스며드는 한기에 진저리를 치며 현관문을 열고 신문을 집어 들었다. 1면부터 사설까지 훑고 나니 오전 8시.

늦잠을 자는 아내를 깨우지 않으려고 조심조심 어제 먹고 남은 된장국에 보온밥통에서 꺼낸 밥을 말아 후루룩 삼킨 뒤 등산화 끈을 맸다.

오전 9시 서울 서초구 서초동 청계산 입구에 도착하니 전 직장 동료 7명이 벌써 나와 있었다. 12시 30분 산에서 내려와 순부두찌개에 막걸리를 시켰다. ‘아파트 값’이 도마에 오르니 별다른 안주가 필요 없었다.

등산에서 돌아온 박 씨에게 토요일 오후는 ‘아내와 TV 연속극 재방송 보는 시간’이다. 저녁 먹고 아내와 아파트 주변을 1시간 정도 산책하고 들어와 9시 뉴스까지 보고 나면 주말의 또 하루가 저문다.

“젊었을 때는 회사 근무가 일찍 끝나는 날이면 직원들이랑 술 마시고 가끔 고스톱 치는 게 문화생활의 전부였죠. 돈 많이 드는 골프 대신 사교댄스나 사진, 악기 같은 것 하나만 배워 뒀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커요.”

○ 술… 트로트… 잠…

1970, 80년 고도성장의 주역인 50대에게 문화생활이란 곧 ‘일 안 하는 것(not working)’이었다. 토요일은 당연히 근무하는 날이고, 일요일에도 회사에 나가기 일쑤였다.

“30대에 내가 살던 지방에는 극장이 딱 2개였고, 시립체육관에서 명절 때 하는 쇼가 공연의 전부였습니다. 그때는 노래방도 없었고 술집에서 젓가락 두드리며 이미자 노래 부르는 게 고작이었죠.”

대기업 지방 사무소 출신인 김모(57) 씨는 “그때는 다 그렇게 살아 삭막한 줄도 몰랐다”고 말했다. 퇴직 등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던 생활에서 벗어나도 ‘놀 줄 모르는’ 습성은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중견기업체 중역인 이모(53) 씨는 “주5일 근무제가 시행된 뒤 골프 약속이 없는 주말에는 집에 있으려면 뭔가 불편해 회사 사무실에 나가 책을 읽거나 낮잠을 잔다”고 털어놨다

문화관광부가 실시한 2006년 문화향수 실태조사에서도 ‘문화 황폐’ 50대의 모습은 드러난다.

국민이 가장 많이 체험하는 문화예술 장르인 ‘영화 관람’에서 지난 1년간 영화를 한 번이라도 보았다고 답한 사람이 전 국민 평균 57.9%였으나 50대는 그 절반에도 못 미치는 27. 2%에 머물렀다. 이는 60대 이상의 12.9%보다는 높지만 40대의 48.7%에 비해서는 절반에 가까운 비율이다. 그만큼 50대가 문화적 여유 없이 생활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수치다.

○ 50대가 보낸 청년기는 대중문화의 황금시대

그러나 50대는 한편에서는 ‘한국사회에서 가장 다양한 문화세례를 받은 세대’로 꼽힌다.

MBC 드라마 ‘주몽’에서 모팔모 대장 역을 맡고 있는 탤런트 이계인(54) 씨는 “20대 때 친구들끼리 만나면 주로 서울 명동 중앙극장 부근 튀김골목에서 술을 마셨다”며 “생맥주 한잔에 송창식, 김세환, 양희은 등 통기타 가수들의 라이브 공연을 감상하는 것이 최고 사치였다”고 회고했다.

영화감독 배창호(53) 씨는 현재의 50대가 20, 30대이던 시절 영화 관람은 “지금처럼 데이트용 소일거리가 아닌 고급 문화생활이었다”며 “일부 대학생은 국립극장이나 삼일로 창고극장에서 ‘햄릿’과 ‘에쿠우스’ 등 고전극을 보며 낭만을 찾았다”고 말했다.

대중음악평론가 임진모 씨는 현재의 50대에 대해 “한국 대중문화의 ‘골든 에이지’”라고까지 평가한다.

“50대, 그 중에서도 1950∼1955년에 태어난 세대는 국악, 트로트, 굿 같은 전통 장르뿐 아니라 포크와 록을 포함한 미국 팝송에 샹송, 칸초네, 파두(포르투갈 민속음악)까지 한국 역사상 가장 폭넓은 음악 장르를 섭렵하고 소비한 세대”라는 것. 유신시대를 거치며 정치적으로 억압돼 충분히 표현되지 못했을 뿐 문화적으로는 매우 진보적인 세대였다는 것이다.

서울대 사회학과 송호근(50) 교수도 ‘불모’에 가까운 듯 보이는 50대가 저변에 엄청난 문화적 폭발력을 숨기고 있다고 본다.

문화생산자라는 측면에서 대중음악과 영화처럼 유행에 민감한 영역에서는 활약상이 두드러지지 않아도 연극과 미술, 학문 분야에서는 50대가 맹활약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숨은 파워’는 드러난다.

문화 소비자로서 50대가 부진한 것도 문화에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갈수록 정년 연령이 단축돼 노후대책을 준비하느라 쫓기는 사회경제적 요인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 송 교수의 분석이다.

“올해 56세인 조용필이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가장 ‘오지랖이 넓은’ 가수라는 점은 50대의 문화적 잠재력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대목이다. 조용필이 트로트부터 오페라까지의 섭렵이 가능하듯 현재의 50대는 옛 것과 새것의 가교 역할을 한 세대다. 풍부한 문화적 소양을 발산할 수 있는 기회와 공간을 상실해 너무 오랫동안 ‘실의감’을 겪어 왔을 뿐 50대가 문화적인 활화산이 될 가능성은 충분하다.”(송호근 교수)

<특별취재팀>

▽사회부

김광현 기자 kkh@donga.com

이은우 기자 libra@donga.com

김동욱 기자 creating@donga.com

▽교육생활부

김희균 기자 foryou@donga.com

▽문화부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남원상 기자 surrea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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