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 마오쩌둥이 주도했던 문혁은 이른바 ‘5·16통지’의 발표에서 비롯됐다. 이 문건에서 그는 문혁은 공산당을 장악했던 ‘수정주의자들’을 숙청하기 위한 계급투쟁임을 분명히 밝혔다. 이 때문에 그는 홍위병들이 당권파를 공격하기 위해 베이징대에 붙인 대자보를 칭찬하면서 ‘조반유리(造反有理·반란은 정당화된다)’라고 했다.
우리는 여기서 당시 마오쩌둥이 내세운 논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중국이 사회주의제도를 이미 도입했지만 류사오치(劉少奇)와 펑전(彭眞) 같은 당 지도층의 이념은 여전히 소련의 흐루쇼프(흐루시초프)와 같은 수정주의를 실천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상부구조’를 사회주의적 하부구조(경제기반)에 부응하게 만들기 위해 문혁을 통해 그들의 사상을 개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념을 중시한 논리였다. 그리하여 수정주의 사상의 온상이라고 생각한 대학들을 모두 폐쇄했고 대학생들이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면서 당권파들과 구제도를 파괴하게 방치했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할 때까지 문혁은 지속되었다.
이후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는 숙청되었던 덩샤오핑을 복권시켜 자신이 사망한 뒤 중국을 영도하게 했다. 덩샤오핑은 1978년 12월 당중앙위원회에서 개혁개방정책을 당의 새 노선으로 지시했다. 그가 고양이의 색깔이 희든 검든 간에 쥐만 잘 잡으면 좋은 고양이라고 한 것은 그의 실용주의 정책을 잘 표현했다.
이때부터 중국은 실사구시(實事求是) 정신을 따라서 농업, 공업, 과학기술 및 국방에서 ‘4개 현대화’ 계획을 일관되게 추진해 왔다. 그 결과 중국 경제는 연평균 9%의 성장률을 달성해 왔다. 다국적 투자기업 골드만삭스에 따르면 이 추세가 지속될 경우 중국은 2041년경에는 세계 최강국이 된다. 미국 인도 일본 독일은 그 뒤를 따른다는 예상이다.
과거 40년간 중국이 겪어 온 역사를 되돌아보면 중요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문혁은 1950년대 마오쩌둥이 밀어붙였던 대약진 운동처럼 결국 실패했고 수천만 명을 희생시켰다. 덩샤오핑은 문혁 때 숙청되었던 인사들을 모두 복권시켰고, 이후 이들은 중국 경제의 재건과 발전을 주도해 왔다. 장쩌민(江澤民)과 후진타오(胡錦濤)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들은 생산성 향상에 총력을 기울여 실로 빛나는 실적을 내고 있다. 마오쩌둥이 그토록 주창했던 이념투쟁은 1949년 이전의 구질서를 파괴하는 데는 기여했지만 공산당 집권 후 경제를 재건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 못했다.
2001년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한 중국은 세계화의 물결에 동참하면서 선진국으로 부상하고 있다. 그리하여 현 지도층은 이념투쟁보다는 경제 발전을 위해 단결과 안정을 강조하고 있고, 대학들은 첨단지식과 기술을 연마하는 데 여념이 없다. 적어도 3개 대학은 100개의 세계 최고대학 등급에 진입했다. 그러나 한국의 대학은 아직도 이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원래 이념은 사람을 사람답게 살게 하기 위한 도구다. 이것이 거꾸로 인간성을 억압하고 훼손하면 오히려 없는 것보다 못함을 문혁의 경험은 잘 보여 주고 있다.
안병준 KDI 국제정책대학원 초빙교수·학술원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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