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홍찬식]국립중앙박물관의 ‘셋방살이’ 역사

입력 2005-10-26 03:08수정 2009-10-08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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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이 광복 60년, 대한민국 건국 57년 만에 ‘내 집’을 갖게 됐다. 국립중앙박물관은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는 떠돌이 신세였다. 모레 개관하는 용산 박물관은 횟수로 치면 여섯 번째 이사가 된다.

용산 박물관을 신축하는 동안 국립중앙박물관은 경복궁의 임시 건물에 8년간 세 들어 있었다.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내세우기에는 너무 초라해 보기가 민망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어디 있는지도 잘 모르는 국민이 많았다. 세계 10위권의 경제규모에 문화강국을 내세우는 한국이 국립중앙박물관을 푸대접했던 것은 여러모로 아쉬움을 남긴다.

중국 문화재를 보려면 중국이 아닌 대만에 가야 한다는 말이 있다. 62만 점에 이르는 핵심 문화재가 대만의 구궁(故宮)박물관에 있기 때문이다. 중국 국민당의 장제스가 1949년 중국 대륙을 공산당에 내주고 퇴각하면서 필사적으로 가져온 것들이다. 장제스는 “나라를 잃을 수는 있어도 문물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말을 남겼다. 문화재 확보가 중국의 정통성을 잇는 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우리도 6·25전쟁 때 국립박물관의 문화재를 북한에 몽땅 내줄 뻔했다. 서울을 점령한 북한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에서 밀려나게 되자 국립박물관의 유물을 북으로 가져가려 했다. 국립박물관 직원들은 ‘지연작전’을 벌였다. 문화재를 최대한 천천히 포장하고 ‘크기와 내용을 기록하는 일을 빠뜨렸다’며 포장을 다시 푸는 식으로 시간을 끈 것이다. 북한군은 시간에 쫓기자 문화재 반출을 포기하고 도망쳤다.

국립박물관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고 김재원 박사(1909∼90)다. 1945년 9월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인수해 1970년 정년퇴직할 때까지 25년간 박물관장으로 재직했다. 그가 자서전 ‘박물관과 한평생’에서 증언한 국립박물관의 역사는 대한민국 건국의 압축판이다.

일제로부터 박물관을 이어받았으나 일본인 직원들이 모두 가 버려 맨손으로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저기 수소문해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을 끌어 모았다. 곧 이어 6·25전쟁이 터지자 생명을 걸고 문화재를 지켜 냈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는 한국 문화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1957년 미국 순회전시회에 이어 1961년 유럽 전시회를 성사시켰다. 워싱턴의 국립미술관에서 시작된 한국 국보(國寶)의 미국 전시회에선 체면 불고하고 미국에 경비를 대라고 손을 벌렸다.

새로운 국가체제를 구축하고 전쟁의 피해를 극복한 뒤 정체성을 수립해 가는 과정은 힘들었다. 요즘 사람들이 잊고 있을 뿐 우리 사회 전체가 국립박물관과 비슷한 역경을 딛고 오늘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 와중에 박물관이 소외당한 것은 국민의 역사인식에 분명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국보 문화재를 60년간 여기저기 떠돌게 하면서 은연중 ‘우리 역사는 별 볼일 없는 역사’라는 선입견이 자리 잡았을지 모른다.

중국과 일본이 역사 왜곡을 통해 ‘우리 역사가 최고’라고 떠받드는 틈새에서 한국 역사만 어느새 패배한 역사가 되어 ‘청산 대상’에 올라 있는 게 현실이다. 경제를 일으킨 세대들이 가난 탈출에 매달리느라 역사와 문화에 신경 쓰지 못했던 결과가 부메랑이 되어 다시 그들을 공격하는 것이다.

용산 박물관은 규모로는 세계 6대 박물관에 꼽힌다. 때늦기는 했지만 우리 국력이 만들어낸 국가적 상징이다. 지금부터라도 내용물을 충실히 채워 우리 역사를 제대로 바라보는 토대가 되었으면 한다. 국립박물관의 산파역인 김재원 박사가 만약 살아있다면 새 건물을 보고 어떤 심정일지 궁금하다. 감회에 젖어 눈시울을 오래 적시지 않을까 싶다.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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