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이야기]모스크바/"러시아 산타 백마썰매 타고 와요"

  • 입력 2003년 12월 18일 17시 1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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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북부 벨리키 우스튜그의 제드 마로스 마을에 사는 러시아 공인 제드 마로스와 눈의 요정 스네구로치카(위).벨리키 우스튜그에 있는 제드 마로스 마을에서는 겨울철 관광객들을 위한 여러가지 이벤트가 열린다. 모스크바=김기현특파원 kimkihy@donga.com
러시아 북부 벨리키 우스튜그의 제드 마로스 마을에 사는 러시아 공인 제드 마로스와 눈의 요정 스네구로치카(위).벨리키 우스튜그에 있는 제드 마로스 마을에서는 겨울철 관광객들을 위한 여러가지 이벤트가 열린다. 모스크바=김기현특파원 kimkihy@donga.com
모스크바 남부 레닌 언덕에 있는 어린이 문화궁전. 어린이들이 방과 후 예체능 과외활동을 하는 이곳에 저녁 무렵이 되자 20여명의 ‘어른’이 모여들었다. 여대생으로 보이는 20대에서 40대 중년남성까지 연령도, 옷차림도 다양했다.

이들이 찾아온 곳은 모스크바개방대학(MIOO)이 개설한 ‘제드 마로스(Ded moroz) 학교’. ‘추위 할아버지’란 뜻의 제드 마로스는 고대 러시아 설화에 등장하는 러시아식 산타클로스다.

제드 마로스는 빨간 코와 하얀 수염에 선물이 잔뜩 든 주머니를 짊어진 모습이 산타클로스와 비슷하다. 그러나 루돌프 사슴이 아닌 백마가 끄는 썰매를 타고 손녀인 스네구로치카(눈의 요정)와 함께 다닌다는 것이 차이점. 원래는 파란 외투를 입었으나 언제부턴가 산타클로스처럼 빨간 옷으로 바뀌었다. 러시아 어린이들은 제드 마로스를 실제 인물로 믿고 크리스마스 때면 선물을 기다린다.

○제드 마로스가 되려는 사람들

제드 마로스 학교 수강생들은 제드 마로스 역을 맡아 ‘욜카’ 무대에 서려는 사람들이다.

욜카는 러시아어로 크리스마스트리를 뜻하지만 제드 마로스와 스네구로치카가 등장해 춤과 노래 이야기 등으로 꾸며지는 어린이를 위한 공연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렇다고 이 제드 마로스 학교가 연기를 배우는 곳은 아니다. 학교라는 명칭을 쓰고 있지만 실제로는 매해 12월 2주 동안 개설되는 단기 교육 과정이다. 2001년에 처음 생겨 올해 3기 수강생을 맞았다.

초등학교 교감 선생님인 뱌체슬라프 고를로프(40)는 몇 년 전부터 재직 중인 학교에서 크리스마스 때마다 제드 마로스로 ‘데뷔’해 학생들에게 욜카를 보여줬다. 독학으로 연기를 익히고 공연 레퍼토리도 스스로 개발해 요즘에는 인근 학교에서 초청을 받을 정도로 유명해졌다. 올해는 더 멋진 공연을 보여주려고 아예 제드 마로스 학교에 등록했다. 기회가 되면 보육원이나 장애어린이들을 모아 놓고 자선 공연도 할 계획.

남성 수강생들이 제드 마로스 역을 익힌다면 여성 수강생들은 스네구로치카 역을 배운다. 어린이문화궁전의 음악교사인 알렉산드라 쿠르로예바(25·여)는 자기 반 어린이들에게 직접 공연을 보여주고 싶어 이 과정에 등록했다. 이곳의 수강생들은 대부분 그처럼 학교나 유치원 교사, 사범대학생, 어린이 관련시설 종사자들이었다.

교육 내용은 발성과 연기의 기초부터 분장하는 법, 제드 마로스의 무대 매너와 율동까지 다양하다.

“무대에 오르자마자 아이들의 주의를 집중시켜서 정말 제드 마로스라고 믿게 만들어야 합니다.” 전문 연기자인 강사의 설명을 듣는 수강생들의 표정이 진지하다.

이들은 교육 과정이 끝나면 24일 문화궁전에서 수백명의 어린이들을 초청해 ‘졸업시험’을 겸한 공연을 할 예정이다. 디플롬(수료증)을 받으면 이들은 욜카 무대에 서는 아마추어 제드 마로스가 되는 것이다.

○어른들도 즐기는 욜카공연

욜카 공연은 최근 들어 더욱 인기를 모으고 있다. 연말에는 극장마다 ‘욜카’를 무대에 올리는 것이 일반화됐다. 정통 클래식 발레로 유명한 볼쇼이극장까지도 욜카 공연을 할 정도. 최근에는 어른들도 볼 수 있도록 내용이 다양해지고 무대도 갈수록 화려해지고 있다.

욜카 공연이 유행하면서 제드 마로스 역을 주로 맡는 전문 배우까지 나오고 있다. ‘12개의 욜카’라는 레퍼토리로 유명한 뱌체슬라프 고르핀첸코(극단 루고디프)가 대표적이다. 그는 올해는 페트로프 광장에서 대형 자선 욜카 공연을 할 계획.

이벤트회사들도 파티를 위한 ‘출장 제드 마로스’ 상품을 내놓고 있다. 올해는 30분 출연료가 15만원까지 올랐다. 호텔이나 나이트클럽 등에서는 성인용 욜카 공연을 하는데 여기에 등장하는 제드 마로스와 스네구로치카는 에로틱한 이미지를 보여 주기도 한다.

제드 마로스와 관련된 가장 큰 이벤트는 제드 마로스 마을과 전국 순회 여행이다. 제드 마로스 마을은 1999년 러시아 북부 볼로고드스크주(州)에 있는 벨리키 우스튜그에 세워졌다. 핀란드의 ‘산타 마을’과 비슷하다. 제드 마로스 재단(財團)이 운영하며 ‘산타 학교’ 같은 제드 마로스 아카데미도 있다. 이 마을에는 러시아 공식 제드 마로스와 스네구로치카가 사는데 겨울이면 관광객들이 몰려온다.

제드 마로스는 12월 중순 이곳을 출발해 전국 주요 도시를 도는 겨울 여행에 나선다. 가는 곳마다 축제가 열리고 모스크바에서 여정이 끝난다. 물론 실제로는 썰매가 아닌 비행기로 이용한다. 제드 마로스 역을 맡은 사람의 신상은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진다. 공개될 경우 제드 마로스 자체에 대한 신비감이 떨어지기 때문.

겨울에만 바쁘고 1년 내내 한가해 보이는 이 공식 제드 마로스는 얼핏 보면 꽤나 괜찮은 직업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실제는 무척 바쁘다. 하루에 수십통씩 날아오는 어린이들의 편지에 일일이 답장을 해야 하고 연말의 이벤트를 위해 1년 내내 긴장하며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김기현 특파원 kimki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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