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하의 새로 쓰는 한국문화]<8>한강·한양·서울

입력 2003-04-09 18:41수정 2009-10-10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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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한강 마포 나루터의 모습. -동아일보 자료사진

모든 고대 문명은 강에서 발생했다. 채취 경제와 원시농업단계에서는 강이 가장 풍요한 환경이었기 때문이다. 한반도에는 수십만년 전 초기 구석기시대에도 사람이 거주했다. 한강의 상류와 중류 양안에서도 구석기 유물이 다수 발견됐다.

약 8000년 전부터 시작되는 신석기시대에 들어오면 한강의 중류와 상류에서 빗살무늬 팽이형토기(변형)의 발굴 보고가 있다. 기원전 2000년 이전의 이 토기는 고조선 특유의 토기양식인데, 한강 유역과 고조선 영역의 관계를 알려주고 있다.

한강의 ‘한’은 고대어의 ‘큰’ ‘위대한’의 뜻이다. 강의 고대어는 ‘가람’이므로 한자가 들어오기 전에는 ‘한가람’으로 불렸을 것이다. 오늘날 한강의 한자표기 漢(한)은 순수 한국 고대어 ‘한’의 차음(借音) 표기에 불과하고, 한문자의 뜻은 없다. 한강은 ‘큰 강’ ‘위대한 강’의 뜻이다.

한강 양안에 살던 고대인들은 ‘한’부족으로 불렸다. 이들은 한반도에서 먼저 원시 농경단계에 들어간 선진부족이었다. 이들의 일부는 고조선 건국에 참가했다. 이 ‘한’부족이 그 후 한문자로 韓, d, 桓 등 여러 글자로 차음 표기됐다.

한강 부근의 가장 높은 산은 ‘한산’으로 호칭됐다. 지금도 ‘북한산(北漢山)’ ‘남한산(南漢山)’의 명칭이 남아 있는데, ‘한강’에서 연원해 정립된 이름이다.

한강 주변의 성읍은 ‘한성(漢城)’으로 불렸다. ‘삼국사기’는 한강변의 ‘한성’을 북성(北城)과 남성(南城)이 있던 것으로 기록했다. ‘한양’은 ‘한강을 낀 햇볕 잘 드는 살기 좋은 땅(성읍)’의 뜻이다. 대개 큰 강의 양안에는 강을 따라 이어진 평야(벌)를 앞에 두고 햇볕 잘 드는 낮은 언덕땅이 있는데 고대에는 이를 ‘달’이라고 불렀고, 한자로는 ‘陽’이라고 의역했다.

고산자 김정호가 만든 대동여지도(보물 제850호) 중 서울 부분. -동아일보 자료사진

한편 ‘서울’은 ‘경도(京都)’ ‘수도(首都)’를 뜻하는 ‘셔블’의 현대어이다. 부여·백제에서는 수도를 ‘소부리(所夫里)’ ‘ㅱ비(泗*)’로, 신라에서는 ‘사벌(斯伐)’ ‘서벌(徐伐)’로 표기했고, 15세기 조선에서는 ‘셔블’ ‘셔우리’ ‘셔울’로 됐다가 현대어에서 ‘서울’이 된 것이다.

오늘의 ‘서울’은 2000여년 전에 이미 수도였던 아주 오랜 고도(古都)이다. ‘삼국사기’는 기원전 18년 온조(溫祖)가 한강을 끼고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에 수도를 정하여 ‘백제’(처음 명칭 십제)를 세웠다고 기록했다. ‘하남’ 위례성이라고 했으니, 한강 북변에도 ‘하북’ 위례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성’의 ‘북성’과 ‘남성’이 곧 ‘하북위례성’과 ‘하남위례성’을 가리킨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서울’은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후 475년까지 약 500년간 백제의 수도였다. 그러므로 서울의 역사를 2000년 역사로 봐야지, 최근 ‘600년’ 역사로 보는 시각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지금 학계에서는 ‘위례성’의 뜻을 해석하지 못하고 있는데, 필자는 ‘위례성’은 ‘왕성(王城)’ 또는 그후 황성(皇城)의 뜻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한자 ‘위례(慰禮)’는 부여·백제어(맥족어) ‘우루’의 음차표기라고 본다. ‘우루’는 초기 ‘왕’ ‘족장’의 맥족어이다. 고대어 우르·을나·어라하, 현대어 위(우)·어른도 동일 계통어이다.

광개토대왕비문에 영락6년(서기 396년) 광개토대왕이 남진하여 한강까지 와서 백제의 58개성을 빼앗았다. 그 성 가운데 ‘우루성(于婁城)’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왕성’을 뜻하는 ‘위례성’(실제로는 하북위례성)과 동일한 성이고 한자 음차표기만 달리한 것으로 판단된다.

백제 온조왕 때에는 한강도 ‘우리하(郁里河)’로 한자 표기됐는데 이것도 ‘우루하’의 한자 차음표기이며, ‘왕성의 강’의 뜻이라고 해석된다.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은 475년 다시 백제를 공격하여 한강을 건너서 수도 ‘하남위례성’마저 점령하고 개로왕을 사로잡아 죽였다. 그리고 ‘위례성’을 ‘남평양(南平壤)’이라 호칭케 했다. 서울은 고구려 지배하에서 약 70년간 ‘남평양’으로 불렸다.

백제는 남쪽으로 내려가 금강유역 공주(公州)에 도읍을 정했다가 성왕(聖王) 때에는 국호를 ‘남부여(南夫餘)’로 고치고 수도도 지금의 부여로 천도하여 ‘ㅱ비’라고 호칭했다. 부여어로 ‘서울’의 뜻이다. 성왕은 한강의 서울을 되찾고자 신라(진흥왕)와 연맹하여 서기 551년 고구려군을 공격해서 마침내 ‘하남위례성’을 회복했다. 그리고 약속대로 한강의 상류는 신라 영토로 하고, 하남위례성이 포함된 중·하류 6군은 백제영토로 했다.

그러나 서해쪽에서 당(唐)과의 무역항을 갈구하던 신라는 약속을 깨고 2년 후인 서기 553년(진흥왕 14년) 백제군을 공격하여 한강 하류까지 점령해버렸다. 진흥왕은 지금의 화성시 해안에 당포(唐浦)라는 무역항을 설치하고, 지금의 서울 이름을 ‘북한산주(北漢山州)’로 바꿨다. 그 후 통일신라시대에는 이를 ‘한산주(漢山州)’ ‘한주(漢州)’로 호칭했다.

고려왕조 개창 후 성종이 995년 지방제도 정비 때 한강 하류 성읍(서울 포함)을 개성 관내(關內)에 편입시켜 서울은 ‘개성문화권’의 남쪽 도시가 됐다. 고려 문종 때 풍수지리설에 의거해 1067년 서울을 포함하여 ‘남경(南京)’을 설치했다가 10년 후 폐지했다. 그러나 숙종은 1101년 다시 ‘남경’을 부활시켜 서울은 ‘남경’이 됐다.

고려 충렬왕은 1308년 3경 제도를 폐지하고 ‘남경’을 ‘한양부(漢陽府)’로 바꿨다. 동시에 서경은 ‘평양부(平壤府)’, 동경(경주)은 ‘계림부(鷄林府)’로 고쳤다. 이때부터 서울은 ‘한양’ ‘한양성’으로 공식 호칭됐다.

이성계(조선 태조)가 1392년 정변을 일으켜 조선왕조를 개창한 후, 1394년 ‘한양천도’를 결정하고 새 수도 건설계획과 공시를 적극 실시했다(이에 앞서 고려 공양왕 때 한양천도계획이 있었다). 조선 태조는 1395년(태조 4년) 마침내 ‘한양’으로 천도하고, 공식명칭을 ‘한성부(漢城府)’로 바꿨다. 그러나 백성들은 ‘셔블’ ‘셔울’ ‘서울’이라는 순수 한국어를 애용했다. 서울은 900년 만에 다시 수도가 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서울은 ‘한강’ ‘위대한 강’을 따라 이어진 평야와 양지 언덕 ‘한양’에 ‘한산’을 병풍으로 두르고 세워진, 2000년이 넘은, 세계에서도 드문 아름다운 고도이다.

한양대 석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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