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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속 그사람]군종병 문홍근 병장

입력 2003-02-09 18:34업데이트 2009-10-11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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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어느 토요일 오후. 육군 상병이던 나는 작전주임에게 호출 받았다. 지역 유지들에게 부대 행사를 안내하는 수 백 통의 초청장을 쓰라는 것이었다.

나는 소속도 다른 데다 황금 주말이 아까워 꾸물댔다. 몇 번의 호출 후, 그는 급기야 씩씩거리며 나타나더니 나에게 우악스럽게 발길질을 해댔다.

바둑도 상대해주고 내 나름대로 친분을 쌓아왔는데도, 그가 이렇게까지 하나 싶었지만 어쩌나, 군대는 계급인데…. 무참히 박살나고 말았다.

분한 마음을 가눌 길 없어 올라간 곳은 내무반 뒤편의 군인교회였다.

그 때 나를 위로해 준 이가 있었으니 바로 남원 출신의 군종병 문 병장이었다. 고물 풍금을 쳐주며 그이는 내 마음의 얼룩을 깨끗이 세탁해 주었다. 평소 교회라면 눈을 흘기던 나도 그날 이후 교회문을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점호가 끝난 후, 은밀히 회동해 커피포트에 끓여먹던 라면, 그리고 가슴을 여는 이야기. 험한 군 생활을 제법 여유있게 마감할 수 있었던 것은 문 병장이란 통풍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몇 년 전 지리산 자락에서 열린 풍수학교에 참가했다가 문득 남원의 문 병장 생각이 났다. 희미한 기억을 뒤적여 교회를 통해 수소문해보니 그는 예상대로 문 목사가 되어 있었다.

내내 전화로만 안부를 주고받다가 얼마 전 오랜만에 만나 근황을 살폈더니, 목회활동만 하는 게 아니라 나눔과 섬김의 공간인 복지관을 운영하면서 불우한 이웃을 돕는 데 앞장서고 있었다. 맑고 선한 눈빛도 여전했다.

휴대전화의 기억번호 19를 누르면 얼른 나타나 지리산 기운이 흠뻑 밴 목소리로 내 귀를 씻어주는 문 병장님. 아니 이제는 남원 살림교회와 남원 사회복지관의 ‘왕초’인 문홍근 목사님. 올해도 세상 낮은 곳을 더욱 많이 보살펴주시기 바랍니다.

이갑수시인·궁리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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