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철학의 고향을 찾아서]중국이슬람의 성지 취안저우

입력 2002-12-15 17:35수정 2009-09-17 0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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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안저우의 ‘이슬람교 성묘’에서는 일찍이 이슬람교가 전파됐던 역사를 엿볼 수 있다.취안저우〓김형찬기자 khc@donga.com

중국 베이징의 한 성당에서 강론을 하고 있던 이탈리아 출신의 신부 마테오 리치(Matteo Ricci·1552∼1610)는 한 구석에서 조용히 자신의 강론을 듣고 아무 소리 없이 사라지는 한 사람 때문에 유난히 신경이 쓰였다. 그 사람은 세 차례나 찾아와 강론을 듣고 아무 말도 없이 떠나갔다. 리치 신부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한 중국인이 말 없이 강론을 듣고 갔다.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고수(高手)였다.’

그 사람은 탁오(卓吾)라는 호로 더 많이 알려져 있는 이지(李贄·1527∼1602)였다. 그는 강론을 듣고 돌아와 리치 신부의 ‘교우론(交友論)’을 제자들에게 나눠주며 읽도록 했다. “서양 신부의 글인데 읽어 볼 만할 게다.”

유교가 세상을 지배하던 시대에 불교 도교뿐 아니라 기독교와 이슬람교까지 넘나들며 기존 이데올로기와 맞섰던 그는 75세의 나이에 감옥에서 스스로 목을 찔러 자살했다. 딸들이 굶어죽고 아들이 익사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던 그는 감옥으로 끌려가기 약 40일 전 자기 죽음을 예견하며 유서를 남겼고, 옥에서 목을 찌른 후에도 하루 반 동안이나 의식이 깨어 있다가 숨을 거뒀다.

그 후 수백 년 동안 사상적 이단자, 반봉건 상업자본 이데올로기의 대변자, 선구적 근대사상가 등으로 끊임없이 재평가 돼 온 그는 현재 베이징의 퉁저우(通州)에 있는 ‘서해자(西海子)공원’ 한 구석에 커다란 비석 옆에 묻혀 있다. 그토록 비참했던 그의 삶을 고려한다면 그 정도로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그 삶이 가진 의미를 아는지 모르는지 무덤 뒷켠에서는 한 청년이 앉아 조용히 책을 읽고 있고 그 앞쪽에서는 공원에 놀러온 사람들이 오순도순 모여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이단자로 비판받던 이지의 묘지는 여러 차례 수난을 겪은 끝에 현재 베이징시 퉁저우의 한 공원에 복원돼 있다.베이징〓김형찬기자 khc@donga.com

현재는 베이징에 소속된 퉁저우. ‘이단자’로 낙인찍힌 그는 당시 수도인 베이징에 너무 가까이 왔기 때문에 더욱 더 비판의 화살을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말년에 그곳 퉁저우에서 당시 베이징의 생동감 있는 현실을 자신의 철학에 담아낼 수 있었다.

그의 고향은 푸젠성(福建省)의 취안저우시(泉州市)였다. 시아먼시(厦門市)와 함께 타이완(臺灣)과 마주하고 있는 이 항구도시는 현대 중국의 치열한 생존경쟁을 온몸으로 느낄 수 밖에 없는 베이징과 달리 남방의 여유를 품고 있었다. 이지의 시대에 서방과의 교류가 활발했던 이 곳은 이슬람교와 기독교의 유입 통로이기도 했다. 이지의 집안에도 이슬람교도가 있었고 그의 아내 황씨도 이슬람교도였다. 그러나 그가 세상을 떠난 뒤 400년이 지난 이 곳에서는 기독교 교회도 이슬람 사원도 찾을 수 없었다. 아열대의 울창한 나무들로 둘러싸인 이슬람 묘원만이 그곳의 오랜 이슬람 역사를 짐작케 할 뿐이었다.

그는 인간의 욕망을 억누르고 천리(天理)를 따를 것만을 주장하던 당시의 유학을 비판하며 인간의 현실적 욕망에 주목했다. 현실 속에서 불평등하게 실현되는 욕망의 상황을 인정하면서 지배층과 피지배층간에 욕망 실현의 평등함을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욕망 자체를 인정해야 했다. 다만, 그는 무절제한 사욕(私欲)의 추구를 막기 위해 저마다 무선무악(無善無惡)한 동심(童心)으로 돌아갈 것을 역설했다. 개인적 수양과 종교적 경지로의 승화라는 방식으로 회귀하기는 했지만 그를 통해 인욕(人欲)과 천리(天理)에 대해 근본적으로 반성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그는 자신의 대표적 저작에 ‘장서(藏書)’와 ‘분서(焚書)’라는 의미심장한 이름을 붙였다.

‘감춰 둘 책’이라는 뜻의 ‘장서’에서는 수천 년의 역사를 자신의 관점으로 비평했다. “그 시비판단은 육안(肉眼)으로 보아서는 이해하기 힘들기 때문에 땅 속에 묻어 감추려 한다”고 적어 놨다.

‘태워 버릴 책’이라는 의미의 ‘분서’는 친구들과의 편지를 모은 것으로 당시 학자들의 고질적 병폐를 파헤쳤다. 그는 “그들은 반드시 나를 죽이려 할 것이므로 태워 버려야 한다”고 적었다. 그럼에도 이 책들을 간행하려 한 것은 언젠가 이를 진심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죽이려 했고 그의 책은 뒷날 다시 읽혀졌다.

그는 죽기 직전까지 이 치열한 싸움을 그치지 않았다.

“이제 75세로 곧 죽을 목숨이지만, 여전히 책 가운데 몸을 두고 필묵에 젖어 있으며 벼루도 항상 갈고 있다.” -‘속분서(續焚書)’ 중에서

취안저우시 한 골목에는 젊은 날의 그가 사상의 혁명을 꿈꾸던 옛집이 초라하지만 단정하게 남아 있다, 그가 마지막까지 갈고 있던 벼루처럼.

철학박사 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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