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먹는 요리]요리 잘하는 부모 밑에서 미식가 난다

  • 입력 2002년 5월 24일 15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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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메인주의 조그만 시골마을 길리아드. ‘산천이 너무 아름다워 신들도 하늘을 떠났다’는 인디언 전설이 있는 이 광활한 소나무 숲의 고장에 전투기 이름을 딴 ‘스핏파이어 그릴’이 있다.

이 식당의 여주인 해나. 그녀의 얼굴엔 늘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아들 일라이는 베트남전의 후유증으로 깊은 산속에서 부모에게조차 얼굴을 보이지 않고 사는 은둔자다. 그런 아들에게 그녀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자루 가득 깡통음식을 담아 뒤뜰에 내놓는 것. 그러면 아들이 아무도 모르게 새벽에 산에서 내려와 자루를 둘러메고 다시 올라간다.

그러던 어느 날 해나의 식당에 퍼시라는 여성이 일자리를 얻기 위해 찾아온다. 빈민가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계부에게 성폭행을 당한 퍼시는 아이를 유산한 뒤 계부를 살해한다. 5년의 형기를 채운 뒤 출감한 퍼시는 새로운 삶을 찾아 아무 연고 없는 길리아드를 찾았던 것이다.

그런데 ‘스핏파이어 그릴’에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해나가 사고를 당하자 퍼시는 혼자서 주방일을 도맡게 된다. 하지만 태어나서 지금껏 제대로 된 음식을 먹어본 적이 없는 퍼시는 달걀 프라이 하나 제대로 부쳐내지 못했다.

그를 보다 못한 해나의 조카며느리 셀비는 퍼시를 돕기 위해 주방일을 자청한다. 그러자 서먹했던 두 여성은 요리를 함께 하며 서로에게 마음을 연다. 사실 셀비 역시 남편의 무시와 독단으로 자신을 지나치게 비하하며 살아온 여성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요리솜씨를 칭찬하는 퍼시를 만나면서 자신감을 갖게 되고, 퍼시는 셀비의 요리를 매개로 자신의 어두운 과거를 털어놓게 된다.

음식의 맛을 미학적·심리정서적 차원으로 연구하는 맛의 기호학자에 따르면 맛의 기억은 두 가지 과정에 따라 축적된다.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선천적인 맛의 기억과 후천적인 학습이나 경험을 통해 습득된 맛이다. 이 두 가지가 뇌 속에 기억되어 각기 다른 음식에 대한 선호도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미각에 대한 경험이 부족한 사람, 즉 퍼시 같은 경우는 맛의 기호 감성 폭이 제한적이어서 최악의 요리밖에 할 수 없는 것이다.

요리 잘하는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 중 미식가가 많은 것도 그런 이유다. 자라나는 아이들의 입맛을 인스턴트 식품에 내맡기는 것은 아이들로부터 멋진 세계 하나를 차단하는 것과 마찬가지 아닐까.

백승국/ ‘극장에서 퐁듀 먹기’ 저자 baikseungkook@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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