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의 컬처플러스]현실감 있는 신데렐라 보고싶다

  • 입력 2002년 4월 28일 17시 32분


‘신데렐라 이야기’를 처음 듣던 일곱 살 적부터 궁금한 점이 있었습니다. 자정이 되면 마법이 풀려 마차는 호박으로, 백마는 새앙쥐로 파티복은 누더기로 변하는데, 왜 그녀가 남긴 유리구두는 변하지 않나요? 어머니는 이렇게 답하셨지요. 다른 건 다 마법에 걸렸지만 유리구두는 처음부터 유리구두였단다. 왜 유리구두만 처음부터 유리구두였어요? 어머니는 한참 동안 아들의 까만 눈동자를 들여다보시다가 이렇게 답하셨어요. 그래야 신데렐라가 행복해지니까!

어머니 말씀이 옳습니다. 신데렐라는 바로 그 유리구두에 작고 고운 발을 쏙 집어넣고 왕자와 결혼을 하니까요. 유리구두가 아니었다면 그녀는 평생 먼지와 재를 뒤집어쓰고 살았을 겁니다.

소설이나 영화에 등장하는 시골 젊은이들의 상경기는 크게 두 유형으로 나뉩니다. 하나는 서울의 화려함에 매혹 당해 그 품성이 돌변하는 경우입니다. 짧은 성공을 거두기도 하지만 결국 저 거대한 자본주의의 검은 아가리에 먹히고 맙니다. 또 하나는 끝까지 시골의 순박함을 지키는 경우입니다. 최근 인기를 얻고 있는 SBS 드라마 ‘명랑소녀 성공기’의 주인공 차양순(장나라)은 당연히 후자겠지요.

신데렐라 이야기를 원형으로 삼는 드라마에는 유리구두와 같은 요소가 숨어 있습니다. ‘명랑소녀 성공기’에서는 힘든 처지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명랑함’과 촌스러운 충청도 사투리로 대표되는 ‘순진함’이 바로 행복을 가져오는 유리구두입니다.

카드 뒷면에 표시를 해서 상대의 패를 알아내는 사기도박단에 관한 기사를 접한 적이 있으시죠. 패를 읽힌 쪽은 결코 돈을 딸 수 없습니다.

차양순은 자진해서 속마음을 훤히 드러내 보입니다. 말한 대로 행동하고 행동한 대로 말하는 겉과 속이 똑같은 인간이지요. 상대를 의식하며 앞뒤를 계산하는 대도시 사람들과는 확실히 다릅니다. 그 순진함으로 인해 번번이 어려움을 겪지만 차양순은 결코 자신의 패를 감추거나 속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명랑하게 그 아픔을 고스란히 떠안습니다. 차양순의 이 명랑함은 꺼벙이나 구영탄 같은 명랑 만화의 주인공처럼 타고난 천성에 가깝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복도에 나가 두 손을 들고 벌을 섰던 기억이 있으신가요. 차양순은 선생님이 없더라도 결코 손을 내리지 않는 바른 생활 짝꿍을 닮았습니다.

신데렐라의 유리구두처럼 차양순의 성공기도 허점투성이입니다. 눈 가리면 코 베어 가는 서울에서 자신의 패를 모두 보이고도 성공할 수 있겠습니까. 시골 출신의 가난한 여공은 재벌 2세와 결혼할 수 없는 것이 견고한 자본주의의 질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명랑소녀 성공기’를 즐겨 보는 걸까요.

우선 이 드라마는 현실이 아니란 것을 미리 전제합니다. 아무리 허황된 이야기가 나와도 원래부터 저 드라마는 신데렐라의 유리구두 같은 이야기니까 용서가 되는 것이지요. 스토리의 치밀한 구성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이미 차양순의 성공이 예약되었으니 그녀가 성공의 고지까지 걸어 갔는지 비행기를 타고 갔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시청자들은 순간순간 닥치는 에피소드를 즐길 뿐이지요. 만화방에서 명랑 만화를 읽으며 스트레스를 풀 때처럼.

차양순의 성공기가 매우 예외적이고 특별한 탓에, 역설적이게도 그녀는‘명랑함’이라는 혼자만의 성에 갇혔습니다. 그녀의 성공은 만인에게 즐거움을 줄지언정 모범 사례가 되기는 어렵지요. 그래서 이런 바람을 가져봅니다. 한 번 정한 믿음을 바꾸지도 않고 주변 환경에 영향받지도 않는 돈키호테형 인간 차양순이 아니라, 낯선 서울 풍광에 주눅도 들고 자신의 성품을 조금씩은 바꾸어나가는 차양순이라면 어떨까. 그때는 그녀에게 성공의 비결도 묻고 실패의 기억도 들어주겠다며 감히 용기를 낼 듯 합니다. 제가 비록 유리구두를 주운 왕자는 아니지만.

소설가·건양대교수 tagtag@freech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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