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어플레이의 적들⑧흑색선전]“너죽고 나 살자”言語테러

  • 입력 2002년 4월 8일 18시 16분


개성 강하기로 세계에서도 이름난 한국인의 자부심과 자기존중.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고도성장의 원동력이 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남 헐뜯기’와 ‘잘 나가는 사람 끌어내리기’라는 사회적 병리현상을 빚어내기도 했다.

선거철과 인사철이면 빠짐없이 재현되는 흑색선전과 투서, 음해는 사회적 통합을 해치는 대표적인 ‘공공의 적’ 가운데 하나. 고속인터넷 보급률 세계 1위라는 정보화의 물결은 인터넷을 통한 흑색선전을 한층 빠르게 확산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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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다리잡기식 음해〓경기 광주경찰서 경무과 민원실에 근무하는 J경사(54)는 10년 넘게 장애인 30여명을 돌보고 있는 선행의 주인공. 그의 집에 어느날 수사관들이 들이닥쳤다. “경찰관이 장애인들을 합숙시키며 앵벌이 구걸을 시킨다”는 음해성 투서가 경찰서에 들어갔기 때문.

현직 교사 P씨는 수도권 K시에서 다양한 연령층을 대상으로 무료 한자 강의를 펼치는 ‘고전문화 지킴이’다. 어느날 그는 교육청에 출두해야만 했다. 인근 학원 강사들이 “현직 교사의 불법 과외”라며 교육청에 제보를 했던 것.

중앙 일간지에서 부동산을 담당했던 C기자는 외환위기 직후 부친의 도움으로 서울 잠실에 재건축 대상 아파트를 샀다. 다행히 값이 올랐고 지난해 이 집을 팔았다. 그때부터 부동산업계에 루머가 돌았다. 사전 정보를 취득한 기자가 수억원대의 차익을 남겼다는 것. 심지어 기업들이 증권가에서 사보는 정보지에도 실렸다. C기자는 “내가 집을 판 직후 집값이 1억원 이상 더 올랐다. ‘작전’을 썼다면 멍청하게 쓴 셈”이라며 허탈하게 웃었다.

흑색선전이 가장 잘 번식하는 토양은 단연 선거판. 지방선거가 다가오면서 악성 투서와 음해는 더욱 기승을 부린다.

최근 한 광역시의 구청장은 “모 국장이 상대당 후보 예정자와 밀착해 있으니 조심하라”는 익명의 투서를 받았다. 이 구청장은 “투서를 믿을 수도 없고 안 믿자니 꺼림칙하다. 당사자를 보면 표정부터 어색해진다”고 털어놓았다.

‘줄서기’와 관련된 비방은 선거 유세장에서 얼굴을 마주보며 흩뿌리는 흑색선전에 비하면 차라리 ‘애교’에 속한다. 중앙 정치권과 지방선거뿐만 아니라 농협조합장, 대학총장, 교육감, 노조위원장 등 각종 선거가 치러질 때마다 흑색선전과 투서 논란은 빠지지 않는 ‘단골 메뉴’다.

▽사이버 공간에서의 흑색선전〓국가 정보화의 상징기관인 정보통신부 홈페이지의 자유게시판이 지난해 10월 전격 폐쇄됐다. 휴대전화 요금, 인터넷 내용등급제 등을 둘러싼 네티즌의 게시판 시위에서부터 ‘특정업체와 정부가 결탁했다’는 등의 음해성 게시물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 정보통신부는 6월부터 3개월간 자유게시판에 올려진 글을 분석한 결과 명예훼손과 비방성 게시물이 27%에 달한 반면 건의와 질의는 각각 10, 14%에 지나지 않았다고 밝혔다.

다른 정부기관의 게시판들도 ‘욕설마당’으로 변해가면서 운영방식을 실명제로 바꿔나가고 있다. 주민등록번호와 실명이 올바르게 기재돼야만 글이 올라올 수 있게 한 것.

인천지방경찰청 자유게시판의 경우 지난해 매달 평균 300여건의 글이 올랐으나 올 1월 게시판 실명제를 실시한 이후 게재건수가 10분의 1 이하로 줄었다.

인천경찰청 관계자는 “기존에 자유롭게 욕설 게시물을 올려놓던 네티즌들이 자기의 신원이 공개될 것을 우려해 다른 사이트로 이동한 것 같다”고 말했다.

특정 기업이나 집단의 잘못된 행태를 널리 알려 바로잡는다는 취지에서 도입된 안티사이트가 최근에는 도를 넘어 흑색선전과 비방의 장으로 변해가고 있다. 특히 연예인을 대상으로 한 안티사이트가 붐을 이루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의 라이벌 사이트를 찾아 출처가 불분명한 억지소문과 폭언을 퍼붓는 경우가 많다.

여성 보컬 P그룹의 한 안티사이트 자유게시판은 P그룹의 라이벌인 모 그룹 팬들과 P그룹 팬들이 서로 비방하는 내용을 올려 ‘격투의 장’을 방불케 한다. 전문 비평가를 연상케 하는 분석적 게시물도 있지만 인신공격성 발언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해외서도 망신〓지난해 7월 우즈베키스탄 정부는 수출입은행에 대외경제부장관 명의의 편지를 보냈다. ‘한국에서 대외경제협력기금 차관으로 제공한 수출품 중 일부가 당초 계약과 다르니 자금집행을 중지해달라’는 내용.

수출입은행 담당자는 “정작 물건을 받는 우즈베키스탄 교육부에서는 문제가 없다고 했는데 대외경제부에서 문제를 삼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재경부 관계자는 “과학기자재 납품업체 선정에서 탈락한 국내 업체들이 우즈베키스탄 정부에 납품제품의 질이 떨어진다는 투서를 보낸 탓에 이런 일이 빚어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2년 전에도 대외경제협력기금 차관의 일환으로 일부 중남미 국가에 의료기자재를 보내는 과정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이 관계자는 전했다.

독일 교민 H씨는 요즘 주변의 독일인들을 만날 때마다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가 사는 도시의 한국교민회장 선거에서 “현 회장이 공금을 유용했다” “○○○는 한국과 독일에 각각 부인이 있다”는 등 인신공격이 벌어져 이 사실이 현지 신문에 보도됐기 때문.

H씨는 “한국인은 해외에서도 서로 헐뜯는다는 말을 그동안 터무니없다고 묵살해 왔지만 실제 경험하고 보니 황당할 뿐”이라며 씁쓸해 했다.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

▼전문가 진단▼

최근 한 무명의 네티즌이 전파시킨 ‘게시판에서 싸움나는 순서’라는 글이 네티즌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우리의 미숙한 토론문화를 함축적으로 잘 보여줬기 때문.

A: “어제 중국집 가서 자장면 시켜 먹었는데, 정말 맛있더군요.” (평범한 문제제기)

B: “자장면이 뭐가 맛있어요? 우동이 훨씬 맛있지. 맛을 안다면 우동!” (반론 위한 반론)

A: “그럼 우동 안 먹는 사람은 맛을 모른단 말인가요?” (말꼬리 잡기)

B: “그만큼 우동이 낫다는 거죠. 에이, 자장은 느끼해서….” (상대방 깎아내리기)

C: “자장면에 대해 잘 모르시는군요. 제가 설명해드리죠. 유래는 어떻고 종류는 어떻고… 자장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상대방 무시)

D: “잘 읽었습니다만, 근데 말투가 기분 나쁘군요.” (말투 물고 늘어짐)

C: “너 몇 살이야?” (반말, 나이로 권위 내세움)

이 글은 이 외에도 흠집내기, 욕설, 말 막기 등으로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식의 토론문화를 꼬집었다.

“재미있고 정확한 글이군요. 흑백 논리가 팽배한 우리의 사회 구조와 토론문화가 학습되지 않은 환경 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종리더십개발원 민주시민교육센터 송창석(宋昌錫·42) 소장의 진단이다.

‘나와 다르다’는 것이 곧 ‘용서받지 못할 적’이 되어버리는 우리의 현실을 감안할 때 ‘민주사회란 나와 다름을 인정하는 사회’라는 사실을 어릴 때부터 내면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송 소장은 말했다. 상대방의 가치나 태도를 인정하는 가운데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훈련이 우리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 공통적으로 부족하다는 것.

“미국 프랑스 등 선진국가에서는 ‘토론’이 교과과정에 포함돼 있어 어린 시절부터 철저한 토론 훈련을 거치게 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학교교육 대부분이 지식전달 위주의 입시교육에 그쳐 교사조차 토론과 토의에 익숙지 않습니다.”

송 박사는 “철자법과 맞춤법을 배우면서 글을 익히기 시작하는 것처럼 학교에서부터 커뮤니케이션 기법, 경청하는 법, 찬반 논쟁하는 법을 기술적으로 가르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이영기자 lycho@donga.com

▼외국인이 본 ‘흑색선전’▼

베로노 스콧 토킹턴(메리츠증권 연구원·33)

“중상과 비방을 일컫는 영어단어 ‘mudslinging’을 ‘mudfighting’이라고 말하는 한국인을 많이 보았습니다. 안타까운 생각이 들더군요. ‘싸우다’라는 뜻의 ‘fighting’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정도구나 싶어서요.”

5년째 한국에 살고 있는 미국인 토킹턴씨는 한국의 정치권에서 행해지고 있는 흑색선전이 갈수록 도를 더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대통령 후보 경선제는 같은 정치적 견해를 가진 사람들끼리 뭉쳐 더 발전적인 방향을 모색할 수 있도록 하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악선전’이라는 부정적인 면이 더 많이 드러나는 것 같아요. 정치적 선전을 위한 과장된 비방과 갈등을 조장하는 발언 등이 유권자를 혼란스럽게 하는 경우가 많아 보입니다. 이에 비하면 세제(稅制)나 복지 등 유권자가 피부로 체감할 만한 부분은 후보자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없어요. 관심들이 없는 것인가요.”

토킹턴씨는 유달리 한국의 정치문화와 선거풍토에 관심이 많다. 한국에 오기 전 지인들을 통해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 대한 자료를 많이 접했기 때문이다.

“한국인이 남달리 정의감이 강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비방’에 대한 검증이 거의 없다는 것이 오히려 놀랍기까지 해요.”

그는 “초고속 커뮤니케이션과 30초 광고로 대표되는 오늘의 현실에서 정치인들이 인신공격이나 중상모략의 힘을 빌리려는 유혹을 떨쳐버리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며 “유권자가 옥석을 잘 가려 대응해야 한다”고 말했다.

“흑색선전을 일삼는 정치인에게 응해줘서는 안됩니다. ‘액션’에 불과한 정치인들의 말에 한국인도 넌더리를 내고 있는 것 같아요. 중상모략에 가담하는 정치인을 거부하고, 깨끗한 이슈로 선거운동을 하면서 한국의 미래를 위해 실행 가능하고 합리적인 청사진을 제시하는 사람에게 투표해야 하지 않을까요.”

조이영기자 ly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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