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복교수의 만화칼럼]슬로건 공화국

  • 입력 2002년 2월 14일 14시 16분


1970년대 당시엔 서독에서 동베를린간 고속도로 통행도 사회주의 국가 영토 안이었기 때문에 무척 겁을 먹어야 했다. 지금도 첫 동베를린 방문은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동독의 땜질 투성이 고속도로가 베를린에 거의 다다를 무렵 시뻘건 바탕에 대문짝 만한 글자로 쓴 대형 현수막이 길 위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베를린-도이치 민주공화국(구 동독)의 수도!’

동베를린이 동독의 수도인줄 누가 모르는가. 서독의 수도를 베를린으로 착각할까봐 동독정부는 그렇게 섬뜩할 정도인 일종의 선전 현수막을 내걸었는지 모른다. 이것뿐만 아니라 서독에서 동독 국경을 넘기가 무섭게 ‘생산성을 올리자’는 식의 여기저기 덕지덕지 도배해놓은 선전 슬로건들은 을씨년스럽기조차 했다.

조금만 뒤집어 보면 우리 한국사회도 이와 별로 다르지 않다. 시뻘건 천에 대문짝 만한 글씨로 과격구호를 적는 것은 어느 나라에나 있는 현상이다. 하지만 마치 사회 정의는 모두 자신이 떠맡고 있는 듯 거리 여기저기에 친절하게 걸려있는 공익광고나 시민의식 홍보 슬로건 현수막들은 아직도 국민을 유치한 교도 대상 이상으로 취급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절감케 한다.

‘교통법규를 준수합시다’, ‘월드컵개최 국민의 자존심을 지킵시다’, ‘거리에 쓰레기를 버리지 맙시다’, ‘내가 먼저 양보합시다’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친절한 슬로건으로 도배되어 있는 대한민국의 도시들. 그러나 국민소득 1만달러 수준의 나라치고 이런 류의 계몽 슬로건이 걸려있는 나라는 우리나라 빼놓고는 눈 씻고도 찾아볼 수 없다. ‘급커브이니 손잡이를 꽉 잡으십시오’, ‘이 엘리베이터는 올라갑니다’ 등 국민을 계몽이 필요한 어린이로 취급하기는 일본도 마찬가지지만 길거리에 ‘질서 지키자’, ‘순서 지키자’는 식의 플래카드나 포어 포스터는 붙어있지 않다. 교통질서가 표어와 현수막으로 개선된다면야 온 나라를 도배해도 아깝지 않겠지만 질서 유지나 순서 지키기란 슬로건이나 표어로 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보자.

병목현상이 만성화된 곳에 아무리 ‘아빠가 먼저 양보하라’는 현수막을 걸어두어도 절대 나아지지 않는다. 끼어들지 못하게 말뚝을 박아 놓으면 저절로 해결된다. 은행에 순서표 발급기가 도입된 이래 새치기는 저절로 사라졌다. 문제는 슬로건이 아니라 시스템이다. 그런데도 시스템이 설치되어야 할 곳에 어김없이 슬로건이 자리잡고 있는 게 우리 현실이다. 더욱 이 슬로건 문화가 우리를 씁쓸하게 하는 것은 ‘이 현수막을 누가 내걸었다’고 반드시 대서특필하는 것이다.

사회질서와 안녕을 위한 공익차원의 ‘좋은 일’이라면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도록 해야 하는데 어찌된 셈인지 ‘XX공단’, ‘○○협회’, ‘△△협의회’ 등 국가기관 내지는 관변단체의 이름이 어김없이 적혀 있다. 이는 공익을 빌미로 한 전혀 엉뚱한 의도가 아닌지 의심이 든다. ‘아빠 먼저 양보하라’는 슬로건 대신 그 현수막 제작비로 끼어들기 방지용 말뚝을 설치하는 것이 선진국으로 가는 백번 빠른 길이다.

이원복(덕성여대 디자인학부 교수·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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