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록의 독서일기]"아들아, 나도 너랑 여행을 하고 싶다"

  • 입력 2001년 2월 26일 11시 58분


사랑하는 나의 큰 아들 한울이 보아라

이제 겨우 16살, 중3이 되는 놈이 어느새 아빠보다 키가 더 커 180를 넘보다니 흐뭇하고 기특하다 해야할 지, 세월이 무섭다고 해야할 지 잘 모르겠다. 오늘은 모처럼 너에게 편지를 쓴다.

엊그제 아빠는 아주 의미있고도 슬픈 책을 한 권 읽었다. 너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라는 유명한 책을 쓴 홍세화라는 사람이 있다. '톨레랑스'(tolerance:서로의 사고방식이나 다른 의식, 문화등을 이해하고 감싸안는 것을 뜻함) 전도사라 할 수 있는 그 분이 연초에 '좋은 책'을 번역해 우리들에게 선물을 했구나.

질베르 시누에라는 프랑스 작가가 쓴 <보거를 찾아 떠난 7일간의 여행>(예담 펴냄 168쪽 7500원)이 바로 그 책이다. '보거'는 아프리카, 이른바 제3세계의 15살 어린이다. 배고픔과 추위에 떨면서, 부모을 잃고 사랑에 굶주린 채, 글도 모르는 가여운 흑인소년이다. 이 책의 화자(話者)인 50대 아버지는 보거와 동갑인 아들과 마법의 양탄자를 타고 일주일간 지구 곳곳을 여행한단다. '양탄자'라고 하니까 디즈니랜드나 구경가고 '아라비안 나이트'에 나오는 신기한 동화나라 이야기인 줄 착각하겠지만, 사실 이 책은 너무 어둡고 우울하고 속이 마구마구 상하는 얘기로만 가득 차 있다.

너도 언제 신문에서 본 적이 있겠지. 기름 뒤범벅된 해안의 가마우지. 첫날은 아랄해로 간다. 바다가 어떻게 오염됐으며 물이 우리 인류에게 얼마나 소중한 자원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자연을 경외시했던 조상들의 모습을 살피며 자연과 환경문제를 생각해본다. 전쟁의 잔혹상, 아프리카의 처참한 가난의 현장을 공중에서 들여다보며 '보거'의 슬픔을 같이 이겨내보자며 자세한 설명을 곁들인다.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인종차별, 종교대립, 거기에 이어지는 생명경시사상, 드디어는 복제양 돌리가 탄생되면서 생명복제의 윤리성에 대해 고민하더구나. 지구와 인간 그리고 우주의 탄생을 들어 생명의 고귀함과 어린 세대의 역할이 앞으로 얼마나 중요한 지 머리를 맞대며 생각해본다.

우주에서 보면 지구는 초록색이란다. 하느님의 최대 선물인 '초록별' 지구를 생각하면 아빠도 늘 가슴이 아프다. 인간은 편리를 추구하며 문명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그것이 이제는 '부메랑'이 되어 재앙을 부르고 있다. 내 아버지가 살고, 내가 살고, 네가, 네 후손이 살아야할 삶의 터전을 너무 많이 망쳐놓았다. 앞만 보고 달려오면서 우리는 자연과 생명의 고귀함을 너무 많이 잊고 살았단다. 이 책은 '속죄하는 어른'과 순진무구한 아이의 대화를 통한 문명 고발서라고 할 수 있겠다. 누군가는 이 책을 '21세기판 어린왕자'라고 하더라. 너도 생텍쥐베리라는 프랑스 조종사가 쓴 '어린 왕자'라는 성인동화를 읽었겠지. 보아뱀이 코끼리를 삼킬 줄을 누가 알았겠니. 네 친구집 베란다에 베고니아가 얼마나 예쁘게 피어 있는지가 중요하지, 잘 사는게 뭐가 그리 중요하겠니.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딘가에 우물이 숨어 있기 때문이라고 했지. 왕자는 여우와 얼마든지 친구가 된다. 그렇지?

아들아, 네 이름을 '한울'이라고 지을 때 생각은 이랬다. '한 울=한 울타리'. 한 울타리는 공동체(comunity)라는 뜻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랬나,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란다. 결코 로빈스 크루소처럼, 최근 영화 '캐스트 어웨이'에 나오는 톰 행크스처럼 살 수는 없다. 아빠도 올해처럼 큰 눈은 몇 번 본 적이 없다. 사람들은 이상기후를, 지구 온난화를 이야기한다. 연전엔 지구종말론이 판을 치고, 새천년 밀레니엄이라고 호들갑을 떨었다. 진짜 새천년의 시작은 올해부터란다. 예수탄생 2천년이 넘어도 지구에는 평화가 없다. 파괴, 약탈, 오염, 강간, 불평등, 가난, 소외등 온갖 나쁜 말만 횡행하는 지구를 우리는 너희에게 물려주고 있다. 이 책은 처음부터 무엇이 어떻게 잘못되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작가는 아빠가 특히 약한 숫자(통계)로 기를 죽인다.

한울아, 아빠도 너와 함께 '양탄자 여행'은 아닐지라도 한반도 상공을, 아니 땅바닥에 발을 붙이고 7일 아니 한달이라도 여행을 하고 싶다. 너에게 무슨 말을 해줄까. 이제까지 아빠가 읽은 모든 페이지위에서 알고 배우고 익히고 예견할 수 있는 지혜등을 고스란히 너에게 심어주고 싶다.

자 첫날엔 무조건 금강산을 가자. 만물상을 보면서 분단으로 할퀸 민족의 상처를 너와 내가 쓰다듬자. 이제는 한반도가, 아니 나아가 세계가 함께 가야 하는 상생(相生)의 시대이다. 이데올로기가 무슨 소용이랴. 지금은 통일(unification)의 시대이다.

아들아, 둘쨋날엔 금강산을 쭉 타고 내려와 백두대간을 종단하자. 백두대간이라 하면 우리땅의 근간이다. 울끈불끈 뻗어내려간 백두대간은 민족의 성지(聖池)인 백두산 천지에서부터 시작되리라. 오묘한 금수강산의 큰 뜻을 몸으로 익히자. 고성쯤 오면 재해로 벌겋게 불타버린 처참한 산몸뚱이가 드러난다. 산불로 인한 자연의 훼손은 또 얼마나 아프냐. 참나무 둥지밑에서 버섯이 솟아난다. 그래 저 말못하는 식물의 생명력을 보면서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음을 느낀다. 이기(利己)도 좋지만 자연에 겸손하자. 개펄이 없어진 시화호의 썩은물을 맛보자. 인위적인 문명의 장난(?)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지 실감해보자. 그리고 지금도 진행중인 새만금 간척공사 현장도 가보자. 환경단체들이 왜 그렇게 목청을 높이는 지도 생각해보자. 너는 '천민자본주의'라는 말의 뜻을 모르겠지. '개발독재'라는 말도. 우리는 근대화 현대화과정을 너무 정신없이 달려나왔다. 실업자가 100만명이 다 된단다. 언제 아빠도 그 대열에 낄 지 모른다. 서울역이나 시청 지하철역 노숙자들의 사진을 본 적 있을 거다. 갈 곳없는 노인들이 서성이는 탑골공원도 가보자. 미아리나 천호동에 가면 신성한 몸을 파는 일단의 여성집단이 있단다. 윤락이라고 하는, 오랜 역사를 가진 직업이다. 도시문명은 이렇게 복잡하단다. 각종 범죄가 날뛰고 온갖 지저분한 문명의 요소가 얽히고 설킨 서울은 '소돔과 고모라'라 하겠다. '달동네'의 뜻은 아니. 봉천동이나 삼양동 산동네도 가보자. 너는 직사각형 철골구조에서만 살아와서 상상도 안갈 것이다. 연탄을 본 적 있니. 아빠는 학생때 연탄가스에 중독돼 죽을 뻔 한 적도 있었단다. 이 모든 것은 빈부격차가 심화되고 복지정책이 형편없고, 노인소외와 남녀차별등 때문이겠지. 이 엄연한 현실에 절대 눈을 감아서는 안된다. 우리는 이보다 더한 곳도 가봐야 한단다.

또 가보자. 동남아시아에서 온 많은 외국인들과 조선족들은 곳곳에서 인간이하의 대접을 받으며 일하고 있다. 우리도 역시 종족차별의 악습을 못버리고 있다. 단군의 자손, 한핏줄을 자랑하면서 외국인들에 대한 저 천대는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 이 나라에도 어디 '보거'가 한 두명이랴. 고아수출 1위국, 해외입양이 줄을 잇고 있단다.

너도 내년에는 고등학교를 간다. 벌써부터 '경쟁'에 대하여 떨고 있구나. 그래, 산청의 간디학교를 가보자. 대안학교에서는 어떻게 교육을 하나 들여다보자. '백년대계'라는 교육정책이 왜이리 갈팡질팡하고 생각있는 많은 사람들이 대안교육을 꿈꾸는지,오로지 경쟁사회로 휘몰린 청소년들의 심성과 미래에 대하여, 공부벌레만을 양산하는 현실에 대해 생각해보자. 너도 어느정도 결론이 서겠지. 그래 제 마음대로 판단하여 결정해보라. 대학 안가면 어디서 사람노릇 못하겠냐.

벌써 5일째, 너같이 심약한 놈은 눈물도 많이 흘릴 테고 걱정이 돼 머리가 터질 지경인 줄 안다. 하지만 그늘이 있으면 어디 빛이 없으랴. 이렇게 어둡고 비참하고 슬픈 광경만 있겠느냐.

우리 남도 문화유산 답사에 나서자. 조상들의 지혜와 향기가 그대로 배어있는 문화유산을 보면서 민족의 자긍심을 느껴보자. 땅끝마을에 서 상큼한 제주 바람을 맞으며 심호흡을 하고 전통문화와 예술을 가꾸고 지켜내야 한다는 의무감도 갖도록 하자.

아들아, 이제 또 너의 고향(아빠는 이것을 비극적으로 생각한다) '소란한' 서울로 가자. 새벽2시. 남대문시장, 동대문시장이다. 아니 한낮이어도 좋다. 팔딱팔딱 뛰는 싱싱한 생선처럼, 여기에는 역동적인 삶이 있다. 활기가 넘친다. IMF네, 경제가 나쁘네 해도 여기에는 또순이 아줌마가, 아저씨가 엄청나게 많이 있다. 해장국 한그릇 뚝딱하고 또 웨장을 친다. "골라 골라" "싸게 싸게" 철시할 무렵이면 이제 여행을 끝내고 집으로 오자.

너에게 너무 많은 것을 보여줘 헷갈리게 할 생각은 없다. 허나 알 것은 알아야 하고, 볼 것은 보아야 하고, 생각할 것은 생각해야 한다. 이제 10대 후반이 되어, 내일모레 대학을 갈 무렵, 그때 '어린 왕자'을, '보거'를 생각하면서 속정많은 아빠를 이해해주었으면 고맙겠다.

하나밖에 없는 동생하고 찌그락짜그락하지 말고, PC방이네 컴퓨터게임이네 별 영향가없는 그런 놀음에만 빠지지 말고, 영어면 영어, 한자면 한자, 수학공식이면 공식 하나 진지하게 외우고 풀면서 건강하게 잘 크기만을 빈다. 책 좀 읽어라, 이놈아!

아빠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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