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국을 떠났던 선조들⑩]사연많은 쿠바 이주

입력 1998-03-18 08:00수정 2009-09-25 18:45
공유하기뉴스듣기프린트
공유하기 닫기
쿠바.

카리브해의 ‘진주’로 불리는 정열의 나라. 푸르다 못해 시린 바다물결이 넘실대는 쿠바의 해변은 지금도 유럽인들이 꼽는 관광 1순위다. 미국의 작가 헤밍웨이가 ‘노인과 바다’를 구상, 집필했던 아바나의 밤거리도 여전히 낭만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수도 아바나를 비롯한 전역에는 반미(反美)구호와 카스트로를 찬양하는 플래카드가 뒤엉켜 있다.

낭만과 투쟁의 정서가 묘하게 어우러져 이국적(異國的) 풍취를 더해주는 그 곳, 우리 동포들은 1920년대 초 이곳에 새 삶의 터전을 닦았다.

1921년3월 멕시코 유카탄을 찾았던 한인들의 한 무리가 쿠바의 동쪽에 도착했다. 3백명의 한인들은 지긋지긋한 멕시코 ‘애니깽’농장의 애환을 풀기 위해 동쪽의 ‘진주’를 찾았던 것이다.

이들은 쿠바의 세계적 명산물인 사탕수수 농장에 제2의 인생을 걸었다. 당시 쿠바 정부로서도 한인들의 노동력이 절실했다. 제1차세계대전 후 쿠바의 사탕수수 재배는 번창일로에 있었기 때문이다.

엎친 데 덮친 격일까. 멕시코의 힘들었던 4년간 계약노동을 마친뒤 새로운 인생설계를 꿈꾸던 이들에게 하늘은 또다른 시련을 던져주었다. 이들이 쿠바를 찾을 무렵, 그동안 상한가였던 사탕수수의 시세가 폭락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우리 한인이 이민하기 전에는 설탕 한 근에 20전(센트)일 정도로 가격이 폭등, 황금세계라고도 했는데 동포가 이민한 그해부터는 설탕값이 근당 2전(센트)까지 가격이 떨어졌다.”(임천택·쿠바이민사)

주력상품이 제 값을 받지 못하자 쿠바의 경제는 휘청거렸고 일반인들의 생활상도 비참해진 것은 물론이었다. 설탕농장 경험마저 없었던 우리 동포들에게는 더더욱 날벼락이었던 셈이다.

이들의 인생항로는 쿠바 도착 2개월만에 방향타를 돌려야 했다. 이들은 첫 기착지였던 동쪽편 ‘마니티’농장을 떠나 서쪽으로 ‘고난의 행군’을 시작했다.

‘마니티’ 농장을 떠나 찾은 곳이 수도 아바나에 인접한 마탄사스부근의 ‘애니깽(선인장의 일종으로 선박용 로프의 주원료)’ 농장. ‘애니깽’이 싫어 멕시코를 떠나왔건만 배운 기술이라고는 ‘애니깽’ 농장일밖에 없어 어쩔 수 없이 다시 칼을 잡고 ‘애니깽’을 잘랐다. 나머지 한인들도 부근의 농장에 터를 잡기 시작했다.

“매일같이 새벽 4시에 일어나 오후 5시에 일이 끝나는 고된 나날이 계속됐지. 농장일을 마치면 식당에서 음식을 만드는 일에서부터 닥치는 대로 했어.”

아바나에 살고 있는 장천뇌할머니(78)는 더듬거리는 한국말로 당시를 회고했다. 같이 고생했던 남편은 작년3월 81세로 돌아가셨다고 장할머니는 전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한국에서)우리 집안의 고향은 서울이라고 들었지만 더이상 기억나는 것은 없어. 여기와서 처음에 좋은 일거리를 찾아보려고 했지만 손에 익은 애니깽농장일밖에 할 것이 없었지….”

장할머니는 “이제 당시 한인 1세대들은 거의 죽고 없지만 이분들이 살아계셨을 때는 3·1절 기념식도 치르고 애국가도 불렀어”라면서 “노인들에게 환갑잔치도 해드리고 갓 태어난 어린이들에게 돌상도 차려주었지”라고 말했다.

아바나시내에서 큰 중국집 ‘상아탑’을 경영하고 있는 이상복씨(67). 이씨의 아버지 고향은 평양, 어머니 고향은 서울이었다. 그렇지만 이들도 고향땅을 밟지 못한 채 ‘불귀(不歸)의 객’이 된 지 오래다.

“처음 쿠바에 왔을 때 사탕수수농장에 있다가 나중에 마탄사스에서 ‘애니깽’농장일을 했는데 하루 평균 12시간 중노동에 시달리면서 겨우 1,2페소를 받는데 그쳤다. 11명의 식구가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였다”고 이씨는 기억을 더듬었다.

이씨의 아버지는 세상을 뜰 때까지 쿠바의 공용어인 스페인어가 서툴러 고생했다고 한다. 이때문에 일이 생기면 종종 아들들을 불러 의사소통을 했다. 그러나 이씨에게 아버지는 기억저편에 있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 그 자체였다.

“집에 계실 때는 ‘여기와라’ ‘식사해라’는 한국말을 사용했었지요. 자식들의 교육에 정성을 쏟았으며 우리는 진심으로 존경했습니다.”

농장시절 쿠바 한인들의 주음식은 ‘쌀밥’이었다. 쿠바에서 나오는 쌀로 밥을 지어 먹었으며 김치와 고추장까지 만들어 먹었다는 것이다. 이때문에 한국어를 모르는 쿠바 한인 2,3세들도 ‘고추장’은 한국어로 말하고 있다.

이씨는 17세 때 아바나로 진출, 밑바닥생활을 거쳐 이젠 어엿한 식당경영주로 ‘출세’했다. 비록 사회주의 체제하이기 때문에 국가가 절반의 지분을 갖고 있지만 거느린 종업원수만도 27명이나 됐다.

한인2세인 이씨에게 과거 한국은 낯설은 곳이었다.

“젊었을 때 쿠바에 ‘코레아’라는 말은 없었다. 쿠바인들도 처음에 한국인들이 중국인인줄로 알았다. 1950년 한국전이 발발하면서 쿠바사람들도 코레아를 알았다.”

아바나에 있는 가죽공장에서 일하다 공장 감독관을 지낸 뒤 은퇴한 김봉희할머니(65)는 “당시 한인들은 아주 부지런하고 일을 많이 한다는 평가를 받았지”라고 회상했다.

김할머니는 “87년에 돌아가신 아버지는 죽기전에 고향땅을 밟아봤으면하고 바랐는데, 꿈을 이루지 못했어”라고 아쉬워했다.

쿠바 한인들에게도 피끓는 민족의식이 없을 수 없었다. 이민 초창기 쿠바 한인들의 비극적인 생활상이 외부에 전해지자 미주 한인회에서 모금활동을 벌인 적도 있었지만 나중에 이들은 일제강점기인 1937∼1938년 중국의 한국 임시정부에 한푼두푼 모은 돈을 보내기도 했다.

현재 쿠바 한인1세대들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다만 쿠바 현지인들과 인연을 맺어 뿌리를 내리고 있는 5백50명정도의 한인 2,3세들이 명맥을 잇고 있다.

이들에게 한국은 어떤 모습일까. 세월의 물살은 거스를 수 없는 법. 할아버지 아버지에게서 전해들은 고향에 대한 애틋한 생각은 점차 옅어지는 것 같았다.

쿠바 의대를 89년에 졸업한 노라 림(32·여)은 현재 아메헤아리스 병원의 응급실 담당의. 한인3세의 신세대다.

노라의 봉급은 쿠바 일반인들의 봉급(1백60∼2백80페소)보다 훨씬 높은 4백페소 수준이다.

한인 이민초창기에 대해 노라는 “할머니로부터 과거 고생한 시절 얘기를 들어서 알고 있는데 슬픈 얘기만 들었다”면서 “지금 우리는 소박하게 살아가고 있지만 현 생활에 만족하고 있다”고 말했다.

높은 교육열 덕택에 한인 2,3세들은 노라처럼 의사를 하거나 학계 등으로 진출한 경우가 적지 않다.

이들에게 한국은 더이상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모습으로 다가서고 있다. 아바나 시내를 질주하는 대우와 현대의 자동차와 LG 삼성의 가전제품이 이들에게 비친 한국의 모습이다. 세월은 한세기의 이민사를 닫으며 새로운 세기의 새 장(章)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아바나(쿠바)〓정연욱기자〉

―끝―


Copyright ⓒ 동아일보 & donga.com
당신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
동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