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연지의 세상읽기]정치-화려한 비빔밥

  • 입력 1997년 9월 20일 07시 10분


어느 SF소설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는 말을 들었다. 미래의 어느 시기, 기술과학이 발달하고 기계가 사람의 노동력을 대체하면서 실업자가 엄청나게 늘어났다. 사회가 불안해지고 스스로를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머리좋은 정치가들이 머리를 맞대고 연구한 끝에 세 개의 거대한 공장을 짓기로 했다. 한 공장에서는 우주정거장에 쓰일 거대한 트러스트를 생산한다. 이 트러스트는 수백만 개의 볼트 너트로 연결되는데 이 볼트 너트를 조이는 단순한 일을 하는 건 로봇이 아니라 엄청난 수의 사람이다. 또 다른 공장에서는 이 거대한 트러스트를 운반해와 해체해 고철로 만든다. 여기서도 로봇을 쓰지 않는다. 모든 일은 사람이 한다. 또 한 공장에서는 그 고철을 용광로에 부어 새로운 모양의 트러스트 구조물과 볼트 너트를 생산해 첫번째 공장으로 보낸다. 이렇게 해서 사람들은 먼 옛날, 20세기처럼 일을 하고 그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고 있다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산다. 어디서 우주정거장이 지어지든 말든 사회는 안정되고 정치가들은 발뻗고 자게 된다. 이제 오늘의 우리 정치가들을 살펴보자. 「나」는 「너」를 도덕성이 결여되어 있으므로 나라의 지도자가 되기에 어림없다고 비난한다. 「너」는 「나」를 구시대의 인물이니 새 시대의 정치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공격한다. 국민이 자신을 간절히 원하는 까닭에 그 전에 국민 앞에서 한 약속은 없었던 일로 하자고 한다. 정작 정치며 지도며 국민은 보이지 않고, 서로 폭로하고 시비걸고 변명하고 비꼬느라 조용한 날이 없다. 이런 다채로운 수사와 화려한 반전과 대담한 거짓의 비빔밥이 소설보다 더 맛있을 수밖에 없으니 출판계에서는 소설(SF를 포함한)이 안 팔린다고 아우성을 친다 그러나 막상 누가 월북하고 누가 망명하고 온나라의 경제가 마비되는 사태가 닥쳐오면 모두들 잘못은 상대가 저질렀다고 한다. 도대체 그렇게 되기까지 자신들은 뭘 했기에? 아무 것도 안한 것이 잘못은 아니고? 정치는 없는데 정치가는 많으니 이게 무슨 일인가. 정치가 정치가에게 일자리를 주기 위해 존재하는가. 그들 극소수에게 행복감과 권력을 안겨주기 위해? 이게 어찌 「만만한」 정치만의 일이리요.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는데. 거대하고 단단해보이는 조직, 「계(界)」, 무슨무슨 사회일수록 이런 일이 없는가 생각해볼 일이다. 물은 고이면 썩는 법이니까. 최연지〈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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