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률 시인의 홋카이도.문.답]<6>산책을 하면 삿포로의 눈빛을 마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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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년 3월 25일 14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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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포로에 오면 제일 가슴 뛰는 일이 ‘걷는 일’이다.
무작정도 걷고, 생각이 나서도 걷고, 일부러 운동을 하려고도 걷는다.
쇼윈도우 앞에 서서 한참 동안 안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차분한 표정을 읽기도 하며, 그러다 어느 한 곳으로 들어가 두 발과 두 눈을 쉬게 한다.

그곳은 대부분 커피 한 잔을 마실 수 있는 곳이었다.

삿포로를 꽤 여러번 찾은 적 있는 나는 삿포로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곳이 한 군데 있는데, 그곳은 바로 ‘Fab’라는 이름의 카페다. 다누키코지 끝 7초메 지나 다음 블록에 있다.

조용하고 깔끔하고 무엇보다도 그다지 꾸미지 않았다는 매력을 가진 편안한 곳이다. 하지만 꾸미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꾸밈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건 어려운 일일 듯한데 그곳은 그걸 가능하게 한 곳이다.

누구나 가져다볼 수 있게끔 여러 잡지가 꽂혀 있는 것처럼 누구나 그곳에 가면 시간을 번다.
나는 그곳에서 나의 시간과 연애에 빠져들곤 한다.

내 시간에게 커피 한 잔을 권하고 내 시간이 들려주고 싶어 하는 달콤한 이야기들을 듣는다.
그 무엇보다도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건 그 카페의 주인이다.

50대 중반쯤 됐을 그 사내는, 무던하게 자기 일에 열심인 것은 물론, 정말이지 자신의 카페를 사랑한다는 느낌을 진동처럼 카페 안에다 퍼지게 한다는 인물이라는 점이 그렇다.

이를테면 깊은 밤, 그 카페 앞을 지나고 있을 때 무릎까지 오는 장화를 신고 눈을 치우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데 삽을 놀리는 신실한 손길만 봐도 그가 삿포로 뒷골목의 대표 모델쯤 되어 보인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늘 하는 일을 과연 그렇게 근사한 모습으로 할 수 있을까.

나는 일본어가 서투르고 그는 영어가 서툴러 번번이 두 마디 쯤에서 대화가 그치지만 나는 그가 그 공간 안에서 충분하고도 엄격한 예술을 하고 있다고 느끼곤 한다.

나는 그곳에서 많은 원고 작업들을 했다. 나에게 있어 작업을 하기에 그만한 곳이 아직까지는 지구상에 없다는 생각이다. 아마도 그곳이 나의 감성과 딱 들어맞는 곳이기 때문이리라.

나는 어쩌면 다음 기회가 온다면, 그 카페의 주인을 긴 시간 동안 인터뷰 할 것 같다. 그리고 제법 긴 글을 쓰게 될 것 같다. 이런 기분과 기운은 분명 삿포로가 주는 선물이다.

뭐든 비켜섰을 때 기회가 오는 것 같다. 적당히 거리를 두었을 때 의외로 매 순간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삿포로 산책의 오묘한 비결은 이런 식이다.

그곳에 조금 오래 앉아 있었다 싶으면 다시 다누키코지의 반대를 향해 걷는다. 다누키코지는 삿포로 스타일의 상가가 밀집되어 있는 곳으로 삿포로의 냄새를 한껏 느끼기에 충분하다. 다누키코지를 훑으며 다누키코지 1초메 끝에 위치한 니조시장(해산물과 건어물을 파는 전통시장)으로 이어지는 산책코스는 삿포로 사람들의 진한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곳이어서 아늑하고도 정감 있는 산책을 즐길 수 있다.

내 마음 속에는 미니어처 (miniature)가 하나 있는데 바로 다누키코지에서 니조시장으로 이어지는 산책로가 그것이다. 니조시장 쯤에 내 집 하나를 마련해놓고 산책을 하거나, 작업을 하러 카페로 향할 때 그 길을 따라 걷는 것.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시장에서 생선 한 마리를 사서 돌아오는 것. 그 직선의 거리에 인생의 한때를 잠시 부려놓아도 괜찮을 거라는 생각, 그런 생각만으로도 나는 참 부자인 것 같은 것이다.

시인 이병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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