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률 시인의 홋카이도.문.답]<5>따뜻한 물이 주는 아주 따스한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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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년 3월 18일 15시 1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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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 좋게도 노보리벳츠 온천에서 하루를 묵었다.

그날 밤은 조용히 지나갔다. (단순히 눈이 오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 기다렸다는 듯 거센 눈발이 나부꼈다.

아, 온천을 하는 동안 눈을 맞을 수 있게 되었군.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준비물은 하나도 필요하지 않았다.

몸만 준비하면 되는 거였다. 그리고 한껏 즐길 마음의 여유도.

눈을 맞으며 온천을 하면서 큰 산 하나를 가릴 듯한 눈발에 도취되고, 물이 주는 위로를 태연히 받아들였다. 그동안 온천이란 것을 잘 모르기도 했었고 썩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는데 역시도 물의 성분과 질감이 달라도 많이 다르다는 실감이 들었다. 은밀한 물의 애무를 받아들였다.

죠잔케이 온천에서도 하루를 지냈다.
도착하기 전부터 눈이었고 마을에 도착해서도 온통 눈이었다. 얼른 방수화를 챙겨 신고 해가 지기 전 마을을 돌아보기 위해 외출을 했다. 우산이 없이는 안 될 것 같은 눈이라 우산을 들고 나왔는데 우산에 내려앉는 눈소리가 여행의 배경음악처럼 귀에 쟁쟁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해마다 겨울만 되면 눈을 쓸었을 것 같은 익숙한 몸짓으로 마을 어르신들이 집 앞에 나와 하염없이 내리는 눈들을 쓸고 계셨다. 나는 그들의 경건한 노동에다 따뜻하게 눈을 맞춰 인사를 드렸다.

마을을 한 바퀴 도는 동안, 마을 전체에 자욱한 눈발과 온천수가 뿜어내는 수증기를 보면서 축복 받은 땅의 유별난 기운을 느끼려고 애를 썼다.

내 인생의 속도를 조금 늦추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산책에서 돌아온 그날 밤과 다음 날 아침, 펑펑 내리는 눈을 맞으면 온천을 즐겼다. 섬세한 자극이 온 몸을 깨우기 시작했다.

누구나 그런 꿈을 가지고 있다.

수줍은 듯 맨 몸으로 탕에 들어가, 온천수에 몸을 담그고 머리 위로 떨어지는 희끗희끗한 눈발을 맞는 것. 이런 이미지는 가끔 ‘천국’의 환상적인 이미지하고 맞먹는다. 따분하고 쓸모없는 초라한 현실과 고단한 어깨가 잠시 쉬어가는, 세상 끝의 황홀한 은닉처가 그런 곳일까.

전국 각지에 삼천 여개의 온천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일본. 나는 일본 사람들의 비밀은 바로 이 온천에 있지 않은가 생각한다. 깔끔한 성정과 멋과 맛을 추구하는 삶, 타인에 대한 배려와 유난히 여행을 즐기는 성품, 특별한 조용함과 자존감 등등이 말이다.

삿포로에서 떠나올 때 나는 항상 일본의 <온천 잡지> 한 권을 비행기에 들고 타곤 했었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그리 온천을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다음에 홋카이도에 오게 된다면 그때는 조금 더 온천과 가까워지리라 맘을 먹으면서 말이다. 내 ‘마음 사전’의 두께가 조금은 두툼해질 것 같기 때문이었다.

이번 여행은 그렇게 되어서 다행이다. 지저분한 나의 내부를 닦아낼 수 있었으니 그것만으로 참 다행이다.

시인 이병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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