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세계유산을 지켜라]<3>과거와 공존, 모로코 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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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8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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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했던 고대 아랍 유물, 탐욕에 뜯겨 암시장으로

《 시큰했다. 내리쬐는 태양. 만물이 썩기도 전에 바스러질 듯한 열기. 그 앞에 모습을 드러낸 도시 페스는 온몸이 저릴 만치 당당했다. 북아프리카 모로코에서 1000년 넘게 버텨낸 꼿꼿한 세월. 수도 라바트에서 200km 떨어진 고대 아랍도시는 딱히 수사가 필요치 않았다. 굳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아니어도. 사막을 닮은 회반죽의 무채색은 단순하기에 빼어났다. 》

5층 옥상에서 내려다본 가죽 무두질 작업장 ‘슈아라 탄네리’. 페스는 천연원료로 가죽에 색을 입히는 전통방식을 수백 년째 이어오고 있다. 작업장은 온갖 염료와 오물 냄새가 가득하지만 양과 염소 가죽으로 만든 가죽제품은 형형색색 고운 자태를 뽐낸다.
5층 옥상에서 내려다본 가죽 무두질 작업장 ‘슈아라 탄네리’. 페스는 천연원료로 가죽에 색을 입히는 전통방식을 수백 년째 이어오고 있다. 작업장은 온갖 염료와 오물 냄새가 가득하지만 양과 염소 가죽으로 만든 가죽제품은 형형색색 고운 자태를 뽐낸다.
“사막의 노마드(유목민)도 정착이 주는 육체적 안락을 바라는 순간이 있다. 강력한 왕조가 그 갈망을 포착한 순간,그곳엔 한 도시의 번영이 싹트기 시작한다.”
―14세기 이슬람 사상가 이븐 할둔

페스의 진면목은 그런 먼발치 조망에 있지 않다. 789년 이드리스 왕조의 이드리스 2세가 도읍으로 정한 뒤 지금껏 삶과 부대낀 도시의 속살. 켜켜이 쌓인 시간의 땟자국에 참 가치가 있다. 안내를 맡은 하미드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좁은 골목길을 오르는 나귀를 피하다 어깨라도 한번쯤 부딪혀봐야 진짜 페스에 온 거야.”


도시가 융성했던 시절. 11세기 한 이슬람 시인은 페스의 골목을 ‘포도주가 흐르는 시냇물’이라 불렀다. 스스로 자라난 잡초처럼. 9600여 개에 이른다는 길은 어느 하나 닮은 게 없다. 좁았다 넓어지고, 뻗는가 하면 구부러진다. 아랍인들이 좋아하는 양고기 내장을 닮은 생경한 미로. 라바트부터 동행한 유네스코 직원 무누아르 붑케르 씨(32)가 어깨를 다독였다.

“길을 잃을까 봐 겁내지 마세요. 헤매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습니다. 이곳은 문득 시간을 거슬러 옛 문명 앞에 당도하는 짜릿함을 안겨 주니까.”

조바심이 설렘으로 바뀌는 순간. 길가를 채운 사람들도 시야에 들어온다. 아버지를 따라 노새 옆에 선 꼬마는 눈만 마주쳐도 볼이 빨개졌다. 히잡을 쓴 여인네의 뒤태는 우아하고 도도했다. 낯선 동양인에게도 언제든 악수를 건네는 사내들. 설령 잇속을 드러내도 얄밉지 않다.

마침 수염을 길게 기른 한 노인이 손을 이끈다. 하늘이 뚫린 이슬람식 정방형 안채를 뿌듯이 소개했다. 가진 게 없어도 손님을 반기는 여유. 냉장고를 가리키며 “엘지, 엘지”를 외치는 바깥양반. 슬쩍 고개 내민 아내가 그 품새를 수줍게 바라본다. 부부의 미소, 가족의 마음.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그 모든 게 페스였다.

그들이 일군 저잣거리는 역사적 가치도 높다. 그 집을 나서 몇 발치에 선 푸른 분수대는 도시가 태어날 때부터 자리를 지켰다. 15세기 창건된 환한 풀빛 지붕 아래엔 이교도의 출입을 금하는 왕이자 물라(성직자) 이드리스의 무덤이 있다. 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마드라사(이슬람 고등 대학)가 포함된 카라위인 모스크(860년경)의 고색창연함이란. 143개의 모스크와 7개의 마드라사, 64개의 분수대. 끊어질 듯 이어지는 골목 굽이마다 과거와 현재를 잇는 문화가 오롯한 숨결을 내뿜었다.

“호흡한단 표현은 과학적으로도 맞는 말입니다. 페스의 전통 가옥은 진흙 벽돌과 석회, 모래를 섞어 벽을 세우죠. 여름엔 열기를 내보내고, 겨울엔 온기를 머금어요. 그런 벽들을 주민들은 ‘숨 쉰다’고 표현하곤 합니다.”(무신 엘이드리시 엘오마리 페스지역문화담당관)

도시를 휘감는 숨결은 실제로도 아찔하고 농염하다. 미국 로스앤젤레스타임스는 그걸 “꽃향기와 고양이 사체 냄새의 혼재”라 불렀다. 향신료와 민트 티, 콩죽과 푸줏간, 그리고 쿠스쿠스(통밀을 쪄서 야채와 고기를 얹은 모로코 음식)와 아르간오일(모로코 특산 아르간 나무 열매에서 짜낸 기름)까지. 온갖 냄새가 뒤섞여 형언조차 힘들다. 역사(history)의 어원인 그리스어 ‘이스토레오(istoreo)’가 “눈으로 보고 깨닫다”란 뜻이라면 페스에서 역사는 그 의미를 하나 더 추가한다.

“(냄새를) 맡고 깨친다.”

그 정점엔 페스의 명물 ‘슈아라 탄네리(Chouara Tannery)’가 있다. 수천 년을 이어온 가죽 무두질 작업장. 농밀한 뙤약볕 아래 색료 통 위로 인부들이 펄쩍펄쩍 오간다. 땀기 어린 전통의 손길로 양과 염소 가죽에 색과 질감을 입힌다. 빨강부터 회색까지 넘나드는 오묘한 빛깔. 모두 자연에서 얻어진 양귀비와 사프란, 비둘기 똥과 쇠오줌이 원료. 독한 비린내가 초보의 온몸에 감겨온다. 그제야 입구에서 건네준 유칼립투스 잎사귀가 방향용임을 눈치 챘지만. 페스는 이미 이방인의 혼을 저만치 훔쳐갔다. 태양과 미로와 잔향의 마법으로.
“아름다움은 위험한 건가요?” “위험한 건 아름다움이 아니라 그걸 소유하는 방식이란다.”
―정미경의 소설 ‘아프리카의 별’ 중에서

누구나 안다. 아름다움은 간직하기가 더 어렵다. 시간과 나태가 좀을 먹는다. 하물며 1200여 년을 지탱한 공간. 멈춘 적이 없기에 부침도 공존한다. 페스를 지키는 일은 현재는 물론 미래 진행형이다.

페스의 놋그릇 시장에서 마주친 소년과 나귀. 차가 다닐 수 없는 좁다란 페스의 골목길에서 나귀나 노새는 10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소중한 운반수단이다.
페스의 놋그릇 시장에서 마주친 소년과 나귀. 차가 다닐 수 없는 좁다란 페스의 골목길에서 나귀나 노새는 10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소중한 운반수단이다.
그 때문에 21세기 페스는 망치질 소리가 낯설지 않다. 붑케르 씨가 안내하는 모스크마다 새로 입힌 모자이크 타일과 부목이 눈에 띈다. 1981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뒤 모로코 정부와 유네스코는 주요 50개 유적을 중심으로 복원공사를 추진했다. 지금까지 들어간 돈도 6억 달러(7150억 원)가 넘는단다.

성과가 없진 않지만 충분하진 않다. 손봐도 덧대도 또다시 금이 간다. 겨울철 우기에 특히 취약하다. 하미드는 “지난해 12월 폭우 때도 건물이 무너져 5명이 숨졌다”고 알려줬다. 엘오마리 담당관 역시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페스의 가치는 문화유산과 사람이 함께 어울린다는 데 있습니다. 유적만 보호받을 게 아니라 전통 생활방식도 소중하죠. 그러다 보니 오래된 가옥생활은 언제나 위험이 상존합니다. 지속적인 관리와 조치가 필요한데 예산과 전문 인력이 많이 부족해요.”

척박한 환경 탓에 고향을 등진 이도 늘었다. 1980년대만 해도 페스 알발리(‘Old Fez’라는 뜻)는 인구가 15만 명에 이르렀다. 지금은 10만 명 수준이다. 내버려진 채 자물쇠가 잠긴 가옥도 꽤 있다. 사람이 살지 않으니 곰팡이는 더 빨리 슬어간다.

게다가 이런 빈집들을 노린 블랙마켓(암시장)도 생겨났다. 문짝 하나, 타일 한 쪽도 고풍스러운 유물이니 찾는 이가 많다. 공식적으로 보고된 바는 없지만 현지 주민들은 새삼스럽지 않단 눈치다. 한 주민은 “암시장에선 모스크나 마드라사의 유물도 거래한다”고 귀띔했다.

유네스코가 가장 신경을 쓰는 점도 이런 대목이다. 유네스코모로코위원회의 투리야 마줄린 사무총장은 “교육이 페스의 보존 성패를 좌우할 것”이라 단언했다.

“문화유산은 뭣보다 장기적 안목이 중요합니다. 모로코인에게 페스는 일개 관광도시가 아니라 정신적 수도예요. 현지 주민과 자라나는 세대에게 그런 자부심을 심어야 합니다. ‘문화 교육’을 통해 스스로 지키고 발전하는 토양을 일궈야죠.”

문제인식은 적절하다. 하지만 그게 언제쯤 풀뿌리 민초까지 이어질지. 우연히 들른 한 금속공예점. 장인 무함마드 아타르 씨(43)의 푸념은 건조하되 먹먹했다.

“평생 청동을 두드리며 살았죠. 아버지의 아버지 때부터 이어진 가업이니까. 이것 말곤 딱히 할 줄 아는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요즘엔 그만 일손을 놓고 싶은 때도 있어요. 관광객이야 꾸준하지만 수제품을 찾는 이는 드뭅니다. 기계로 찍은 저렴한 상품에 손이 가는 맘이야 이해가 가지만…. 벌이가 시원찮으니 배우려고 나서는 젊은이도 없습니다. 정부 지원이오? 그런 게 있으면 이런 고민도 안 했겠죠.”

페스를 막 벗어나려던 무렵, 또 한 번 봇짐 실은 나귀와 마주했다. 오르고 또 올랐던 길일 텐데 왠지 주춤거린다. 초로의 주인이 성난 채찍을 내리쳤다. 헐떡이는 신음 속에 마지못해 걸음을 뗀다. 그때 언뜻 눈에 비친 게 눈물이었을까. 자꾸만 돌아봐도 뒤뚱거리는 꼬랑지만 멀어져 간다. 지친 나귀의 미래를 누군들 알겠느냐만. 어느덧 페스에도 느짓느짓 해가 저물어갔다.

글·사진 페스(모로코)=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전통 금속공예점 ‘네크브론즈(Neqbronze)’의 장인 무함마드 아타르 씨. 페스가 자랑하는 청동 도금 접시의 화려한 문양은 일일이 수작업으로 새겨 넣은 것들이다.
전통 금속공예점 ‘네크브론즈(Neqbronze)’의 장인 무함마드 아타르 씨. 페스가 자랑하는 청동 도금 접시의 화려한 문양은 일일이 수작업으로 새겨 넣은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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