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해제 MB5년]<37>이완구의 직격탄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2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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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 “다 팔자야”… 反旗 든 이완구의 시련이 시작됐다

2008년 9월 22일 대전 대덕연구단지 한국전자통신연구원에서 열린 신성장동력 보고대회에서 이명박 대통령과 얘기를 나누고 있는 이완구 충남지사(오른쪽). 이완구는 MB와 15대 국회 때 의원으로서 몇 차례 마주친 것 말고는 특별한 인연이 없었다. 2007년 5월 대선후보 선출 당내 경선을 앞두고 이명박캠프의 강승규 미디어홍보단장(18대 국회의원)이 충남도청 집무실에 찾아왔을 때 이완구는 “서울시장 시절 행정수도를 반대했던 사람을 도와줄 수는 없다”고 지지 요청을 거절했다. 동아일보DB
2008년 9월 22일 대전 대덕연구단지 한국전자통신연구원에서 열린 신성장동력 보고대회에서 이명박 대통령과 얘기를 나누고 있는 이완구 충남지사(오른쪽). 이완구는 MB와 15대 국회 때 의원으로서 몇 차례 마주친 것 말고는 특별한 인연이 없었다. 2007년 5월 대선후보 선출 당내 경선을 앞두고 이명박캠프의 강승규 미디어홍보단장(18대 국회의원)이 충남도청 집무실에 찾아왔을 때 이완구는 “서울시장 시절 행정수도를 반대했던 사람을 도와줄 수는 없다”고 지지 요청을 거절했다. 동아일보DB
“자리 좀 만들어 봐!”

2009년 4월 23일 충남 태안군 안면도 국제꽃박람회를 방문하고 귀경하는 길. 기분이 좋아진 이명박 대통령(MB)은 마이크로버스 뒷좌석에 앉아 있던 맹형규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에게 이렇게 지시했다. 꽃박람회를 안내한 이완구 충남지사와 환담을 나눈 뒤 이완구가 “청와대 밥 한번 먹고 싶다”고 말하자 그 자리에서 흔쾌히 승낙한 것이었다.

재선 의원 출신인 이완구는 정치적 감각이 살아 있었다. 구체적 증거는 없었지만 MB가 세종시 원안을 수정하려 한다는 움직임을 감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은근슬쩍 면담을 요청했다.

면담은 보름가량 지난 5월 8일 청와대 안가에서 이뤄졌다. 맹형규도 참석했다. 이완구는 차를 마신 뒤 조심스레 세종시 문제를 꺼냈다.

이완구=“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MB=“그래.”

이완구는 미리 준비한 A3용지 4장 분량의 보고서를 내밀었다. ‘행복도시 건설 관련 특별보고.’ 문건에는 세종시가 원안대로 추진되지 않을 경우 민심 이반 등의 부작용을 우려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러면서 불쑥 이런 얘기를 꺼냈다.

이완구=“국민과의 약속을 지키셔야 합니다.”

MB=“응….”

이완구=“세종시를 (원안대로) 추진하지 않으면 엄청난 혼란이 생기는 것은 물론이고 신뢰를 잃게 됩니다.”

MB는 별다른 반박을 하지 않았다. 그저 얘기를 듣고 있을 뿐이었다. 이완구는 불안했다. 그래서 이참에 쐐기를 박고 싶었다.

이완구=“약속을 안 지키면 즉각 레임덕(권력 누수현상)이 올 수밖에 없습니다. 앞으로 대통령 말을 누가 믿겠습니까!”

이완구는 권력이 펄펄 살아 있는 집권 2년차의 대통령 면전에서 ‘레임덕’이라는 말까지 꺼내든 것이었다. 그런데도 MB는 화를 내지 않았다.

MB=“6월에 미국 다녀와서 다시 얘기해.”

이완구=“나중에 다시 한 번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완구는 미심쩍었지만 일단 MB를 믿기로 했다. 세종시 원안 추진은 MB의 공약이었다. 맹형규의 기억. “대통령은 노련하다. 조용한 자리에서 상대방과 얘기할 때는 화를 내지 않고, 기분 좋게 다독이면서 들어준다. 그 자리에서 대통령은 세종시 문제에 대한 심각성과 앞으로 민심의 변화가 정부와 여당에 주는 부작용까지 진지하게 경청했다.”

MB는 집권 초만 해도 이완구의 역할을 기대했다. 한나라당 전당대회가 열렸던 2008년 7월 3일 오전 이완구를 청와대 집무실로 올라가는 2층 계단 밑에 있는 방으로 따로 불렀다. 심대평 자유선진당 대표를 국무총리로 임명하려고 하니 이회창 총재를 찾아가 ‘양해’를 좀 받아 달라는 내용이었다. 당시 정치권에선 촛불정국 돌파용으로 선진당과의 연대론이 거론되고 있었다.

이완구는 그날 이회창 자택을 찾아 MB의 뜻을 전했지만 이회창은 묵묵부답이었다. 심대평 카드는 결국 ‘없던 일’이 됐다.

어쨌건, MB는 2009년 5월 면담 이후 이완구를 다시 청와대로 부르지는 않았다.

그러곤 그해 9월 3일 충청 출신의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을 국무총리로 발탁했다. 정 후보자는 바로 그날 서울대에서 기자들과 만나 “행정복합도시(세종시)를 원점으로 돌리기는 어렵지만 원안대로 다 한다는 것도 쉽지 않다고 본다”고 밝혀 세종시 수정안 추진의 첫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하지만 정운찬은 충남지사인 이완구를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

이완구는 이미 수차례 충남 도민들에게 세종시 원안 추진에 도지사직을 걸겠다고 약속한 상태였다. 그해 5월 청와대 안가 회동 이후 한번쯤은 MB와 ‘담판’을 지을 기회가 있으리라 기대했지만 11월 27일 MB가 ‘대통령과의 대화’를 통해 공식 사과와 함께 세종시 원안 수정이 불가피함을 역설하자 그 기대마저 접어야 했다.

며칠 뒤인 12월 3일. 이완구는 기자회견을 열어 “세종시 수정이 공론화된 지금 누군가는 법 집행이 중단된 점과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된 점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며 지사직을 사퇴했다. 다음 해 지방선거 불출마까지 선언했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와도 한마디 상의를 하지 않았다.

광역단체장 사퇴는 김혁규 경남지사가 2003년 야당이었던 한나라당 당적을 버리면서 지사직까지 사퇴한 후 처음이었다. 이완구로서는 MB와의 정면승부를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정치권에선 이완구가 ‘더 큰 자리’를 노리고 정치적 승부수를 던진 것이라는 비판론이 제기됐다.

실제로 여권 내부에선 ‘이완구 총리’ 가능성이 조심스럽게 거론되고 있었다. 사퇴 직후 충남도 자매도시인 일본 구마모토(熊本) 현에 머물다가 귀국한 2010년 4월 25일 당시 한나라당 사무총장이던 정병국 의원이 연락을 해왔다. 두 사람은 성균관대 선후배 사이였다. 둘은 정병국의 지인이 살고 있던 서울 강남구 도곡동 타워팰리스에서 만났다.

정병국=“형님, 충남지사에 다시 출마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이완구=“(황당한 표정으로) 날더러 세종시 입장을 바꾸라는 것이 아니냐? 말이 안 되지.”

정병국=“(머뭇거린 뒤) 형님 판단이 옳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총리로 진출하는 것도 괜찮지 않습니까?”

이완구=“(격앙된 목소리로) 정 총장! 난 총리 자리에 소신을 바꿀 사람이 아니야!”

정병국의 기억. “당시 청와대 분위기를 쭉 스크린하고 만났다. 이완구 지사가 ‘오케이’를 했다면 청와대 쪽을 설득했을 것이다.”

보름여 전에도 비슷한 얘기가 있었다. 4월 7일 늦은 밤 청와대 핵심 참모가 이완구를 찾아왔고, 만남은 서울 강남의 한 호텔 객실에서 새벽까지 이어졌다. 얘기 끝에 참모가 총리직 얘기를 꺼내자 이완구는 “세종시 원안 추진의 소신을 바꿀 수 없다”며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이 참모의 기억. “당시 세종시 수정안을 놓고 조그마한 도움도 아쉬울 때였다. 이완구 지사가 마음을 돌려서 수정안을 지지해주면 큰 힘이 될 수 있었다. 당시 총리 얘기를 했을 수도 있다.”

이완구는 그해 6월 2일 지방선거가 끝나자마자 곧바로 미국으로 떠났다.

그런데 9월 17일 MB와 만날 기회가 생겼다. 충남 부여 백제문화단지에서 열린 ‘2010 세계대백제전’ 개막식 참석차 일시 귀국했는데, MB도 참석한 것이다. MB의 세종시 수정안은 3개월 전 국회에서 이미 부결된 상태였다.

이완구=“(지사직 사퇴로)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MB=“(시큰둥하게) 다 팔자지 뭐….”

팔자…. 이완구는 그 말을 두고두고 씹어야 했다. 두 달 뒤 검찰이 민간인 불법사찰 사건 수사를 벌이던 도중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 직원의 수첩에서 자신에 대한 동향메모가 나왔다. ‘고함…결별 수순, 비리 채증’.

그해 10월에는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까지 검찰 내사를 받고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역린(逆鱗)의 대가는 혹독했다. 이듬해 4월 미국에서 돌아온 이완구는 내사가 1년여간 지속되자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하루에 담배를 4갑까지 피울 정도였다. 2012년 1월엔 혈액암의 일종인 다발성 골수종 판정을 받았다. 19대 총선 출마를 준비했지만 그마저도 접어야 했다. 다행히 완치 판정을 받고, 올해 4월 충남 부여-청양 재선거에서 정치적 재기에 성공했다. 한마디로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었다. 국가인권위원회도 완치 판정을 받은 2012년 10월 국무총리실의 민간인 불법사찰 조사를 위해 이완구를 면담했고, 퇴임 직전인 올해 2월 MB에게 불법사찰이 근절되도록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했다.

재선거 유세가 한창이던 4월 초 어느 날. 대통령실장을 지낸 임태희가 선거사무실에 찾아왔다. 임태희는 이완구의 행정고시, 경제기획원 후배였다. 순간 이완구는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완구=“나를 내사하다니, 어떻게 정치보복을 할 수가 있는 거야!”

임태희=“(놀라며) 처음 듣는 얘기입니다.”

이완구=“대통령실장이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

임태희=“정말 모릅니다.”

이완구=“(마음을 가다듬은 뒤) 지금 선거 중인데 자네가 있으면 평정심을 잃으니까 그만 올라가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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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태희의 설명. “나에게 ‘사람이 바뀌었다’고 섭섭한 얘기를 하더라. 내가 무슨 의도를 갖고 조사를 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속으로 ‘이 자리가 이렇게 업을 쌓는 일이구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완구가 분노한 건 ‘사찰’이었지, 세종시에 관한 MB의 선택이 아니었다. “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서 철학이 있는 겁니다. 국정 철학이 다르다고 비난할 수는 없죠. 결국은 효율이냐, 신뢰냐의 선택 문제였습니다. 나로서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신뢰를 효율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한 겁니다.”

고성호 기자 sungho@donga.com
#이명박#MB#이완구#이명박 캠프#강승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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