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북방송-전단 3년 접했더니 전투의지 상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8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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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코리아 프로젝트 3년차/준비해야 하나 된다]
북한군 대남확성기요원 출신 탈북자 주승현씨가 말하는 대북심리전 위력

“대북 심리전 방송이 북한군에 미치는 효과는 남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크다. 북한 병사들은 13년 복무 기간 휴가도 거의 못 가고 최전방을 지키는데 이 기간 동안 듣는 외부 방송이란 건 오로지 대북 방송밖에 없으니 자기도 모르게 세뇌가 된다.”

2002년 한국에 귀순한 주승현 씨(34·사진)는 탈북자들 중 유일한 북한군 대남방송요원 출신이다. 귀순 전 서부전선 최전방 비무장지대 경계를 담당한 민경대대 소속 심리전제압방송국 방송조장(상급병사)을 지냈다. 2004년 남북이 전방 확성기를 철수하기 불과 2년 전까지 대남 심리전 요원으로 활동해 최근 군이 11년 만에 대북 방송을 재개하고 북한이 이에 맞불 방송을 하고 있는 현 상황을 가장 잘 이해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최전방으로 나온 뒤 몇 달은 대북 방송 내용이 모두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1년이 되니 반신반의하게 됐고 2년쯤 되니 방송 내용을 거의 믿게 됐다.” 주 씨는 이번에 목함지뢰가 터진 지역 바로 맞은편 북한군 최전방 초소에서 대남 심리전 요원으로 있었다고 한다.

18일 만난 그는 “사상이 가장 투철한 병사만 선발되는 정예 심리전 요원으로 대북 확성기 방송의 영향을 막기 위해 활동했는데 내가 먼저 목숨 걸고 휴전선을 넘어오게 될 줄이야…”라며 말을 맺지 못했다.

남쪽에서 보내는 확성기 방송은 어디까지 들릴까. 우리 군은 확성기 출력을 최대로 하면 야간엔 24km, 주간에는 약 10km까지 내용이 전달된다고 발표했다.

대남방송 요원 출신이 말하는 심리전


“목숨 바쳐 싸우겠다던 北 심리전 동료들, 대북방송 내용 들은뒤 그런 말 쏙 들어가”


2004년 남북 장성급 회담 합의에 따라 철거가 예정됐던 북한군의 대남 확성기와 선전물. 동아일보DB
2004년 남북 장성급 회담 합의에 따라 철거가 예정됐던 북한군의 대남 확성기와 선전물. 동아일보DB
“내가 있을 때에는 4, 5km 거리에서도 내용이 다 들렸다. 흐리고 안개 낀 날에 방송 소리가 더 멀리 간다. 지금 북한이 시작한 대응 방송을 제압방송이라고 하는데 확성기 성능이 떨어져 남쪽엔 웅웅거리는 소리만 들린다니 좀 안쓰럽다고 할까. 아마 장비는 내가 있을 때 쓰던 것들을 아직도 쓰고 있으리라 생각된다.”

그가 있었던 서부초소에선 경기 파주 자유로가 보인다. 북한 정치장교들은 병사들에게 “저 도로는 남쪽에 하나뿐인 고속도로로 그나마도 선전용”이라고 교육했다고 한다. “그런 말을 믿었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우리가 그 정도로 어리석진 않다. 도로에 차들이 끊이질 않는 것을 보고 대북 방송에서 들었던 ‘남쪽에 자동차가 1000만 대가 넘는다’는 말이 사실일 것이라고 판단했다. 조선업 1등, 반도체 1등 이런 말들도 당연히 믿어졌다.”

그가 근무했던 ‘제압방송국’은 군사분계선(MDL)에 11곳이 있다. 남쪽의 확성기 설치 지역이 11곳이니 서로 마주보고 있는 것이다.

“제압방송국은 1998년까진 대남방송중계국이라고 불렀다. 그전엔 북한 체제의 우월성과 체제 찬양 같은 대남 심리전 방송을 했지만 1998년 명칭이 바뀌면서 방어 개념으로 바뀌었다. 김일성 찬양 노래를 틀어놓는 정도다. 아마도 남쪽을 향한 체제 선전이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 듯싶다.”

그러다 1999년부턴 전기 사정이 악화되고, 일본산 방송장비가 자주 고장이 나 제압방송조차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자 일방적으로 대북 방송을 들어야 했다고 한다.

그는 북한 병사들에게 심리적으로 끼치는 영향은 방송보다는 오히려 전광판이 낫다고 말했다. 전광판은 멀리서도 글씨가 또렷하게 보이기 때문에 머릿속에 잘 각인된다는 것. ‘삐라’도 효과가 좋다고 했다.

“처음 북한 지도부의 부패상을 담은 삐라를 봤을 때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최전방 민경대원은 북에서 제일 ‘새빨간 집’ 자식들만 골라 보내고 특히 심리전 요원은 그중에서도 제일 사상성이 투철한 사람만 뽑는다. 처음 전방에 올 때는 조국을 목숨 바쳐 지키겠다는 각오가 투철했다. 그런데 3년이 지나니 ‘전쟁이 터지면 내가 과연 싸울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입대 동기에게 이 질문을 했더니 답을 하지 않더라. 그 친구도 처음엔 나처럼 목숨 바쳐 싸우겠다던 친구였는데 말이다.”

그는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듣고 몇 달간 고민하다가 귀순을 결심했다고 한다. 그가 고압 철조망 4개를 돌파해 한국군 초소까지 오는 데 걸린 시간은 25분. 이는 지금까지 최단 시간 귀순 기록이다.

“내가 체험을 해보니 MDL 남쪽은 지뢰 구역이 따로 고정돼 있어 북한군이 MDL만 넘으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다. 반면에 북쪽은 70∼500m의 지뢰밭이 펼쳐져 있다.”

목함지뢰 폭발사건이 있기 전 북한군 병사들이 지뢰 매설을 하는 장면이 우리 군에 포착됐다는 발표에 대해선 “남쪽에 침투하려면 사단이나 군단 공병대가 통로를 열어야 하는데, 그 작업을 한 것이 아닐까 싶다”고 말했다.

그는 연세대 정치외교학과와 동 대학원 석·박사 과정을 마치고 2014년 탈북자로는 최연소 박사가 됐다. 현재 명지대 외래교수로 북한체제론을 가르친다. 그에게 북한군 심리전 요원이었던 과거는 어떤 의미일까.

“귀순 뒤 금호석유화학에서 회사 생활을 좀 했는데, 우연히 나와 비슷한 장소와 시기에 남쪽에서 심리전 요원으로 있었던 여직원을 알게 됐다. 과거 적으로 마주 서서 목소리 경쟁을 했던 남녀가 직장동료가 된 것이다. 처음 서로를 알았을 땐 충격적이었고, 반가웠다. 하지만 그 이후로 우린 둘 다 과거에 대해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한국의 대북방송 재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독일의 경우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까지 2600여 명의 동독 경비병이 서독으로 귀순했다. 북한 병사도 1000명은 넘어와야 통일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최근 10년 동안 귀순한 최전방 병사가 6명밖에 되질 않는다. 대북 방송을 재개하면 병사들의 심리 변화에 영향을 미치리라 본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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