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n Global/창업부터 세계시장 노리는 슈퍼 벤처]<1>겁없는 ‘글로벌키즈’

동아일보 입력 2011-04-01 03:00수정 2011-04-01 09:06
공유하기뉴스듣기프린트
공유하기 닫기
창업초기 벤처 32% 해외진출 “눈높이가 다르다” 《 이들은 우리가 알고 있던 기업과 다르다. 익숙한 한국 땅에서 성장해 해외로 진출하던 기존 기업들은 상상도 못했을 일이다. 창업과 함께 내수시장은 건너뛰고 세계로 향하는 ‘본 글로벌(Born Global)’ 기업들이다. 물론 이들도 처음부터 세계무대에 나서기가 쉽지는 않았다. 뛰어난 기술을 보유하고도 문전박대를 당하기 일쑤였고, 투자자들이 약속을 어기는 바람에 눈앞에서 사업을 포기하기도 했다. 서울대 출신의 한 기업인은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듣지도 보지도 못한’ 대학 출신이라며 냉대받은 얘기를 들려주었다. 아직 실적이 미미한 신생 업체부터 매출 1조 원에 이르는 곳까지 다양한 본 글로벌 기업들이 어떻게 세계시장에 통할 만한 제품을 만들어 내고 해외 시장을 뚫었는지 취재했다. 》

별명이 ‘돈키호테’였던 소년은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자서전을 읽고 꿈을 키웠다. 소년은 25세가 되자 음악사업을 하겠다며 무작정 미국 뉴욕으로 날아갔다.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한국에 들여오려 했으나 실패했다. 할렘가를 전전했지만 좌절하지는 않았다.

센트럴파크를 달리는 뉴요커들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어 2008년 구글 안드로이드 마켓에 운동관리 애플리케이션(앱) ‘카디오 트레이너’를 선보였다. 이 앱은 이때부터 줄곧 건강 카테고리 1위를 지키고 있다. 그의 앱은 일본 NTT도코모의 스마트폰에도 기본으로 채택된다. 맨해튼에 회사를 차린 정세주 ‘워크스마트랩’ 대표(31) 얘기다. 그는 “큰물에서 좋은 회사를 만들고 싶었다”며 “영어를 한마디도 못했고 토익 토플 점수도 나빴지만 마음이 있으면 통한다는 걸 배웠다”고 말했다.

창업 초기부터 세계시장에 뛰어드는 ‘본 글로벌’ 기업이 늘고 있다. 기술력과 글로벌 마인드로 무장한 한국의 본 글로벌들은 좁은 시장을 벗어나 더 큰 꿈을 꾼다. 특히 어릴 적부터 세계문화를 접한 ‘글로벌 키즈’들은 해외시장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 새로운 DNA, 본 글로벌



일반적으로 기업들은 내수시장에서 탄탄한 기반을 다진 뒤 해외로 눈을 돌린다. 낯선 시장을 공략하는 것은 위험이 크다. 그래서 이 위험을 감당할 정도로 국내에서 돈을 벌어야 비로소 해외로 진출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런데 1990년대 초·중반부터 이런 과정을 생략한 ‘돌연변이’가 나오기 시작했다. 본 글로벌 기업이다.

주요기사

지난해 8000만 명이 내려받은 스마트폰용 게임 ‘앵그리 버드’도 ‘본 글로벌’의 작품이다. 세계적으로 대히트를 친 이 게임은 핀란드의 작은 개발회사, 로비오 모바일이 만들었다. 2003년 핀란드 헬싱키공대(현 알토대) 대학생 3명이 게임대회에서 만나 회사를 차렸다.

적잖은 한국 벤처도 본 글로벌을 꿈꾼다. 벤처기업협회가 지난해 2000여 개 벤처기업을 설문조사한 결과 창업 초기 기업 가운데 31.5%가 이미 해외에 진출했다고 밝혔다.

한국의 휴맥스 역시 대표적 본 글로벌 기업이다. 1996년 세계에서 세 번째로 셋톱박스를 개발하고 이듬해 영국법인을 세워 해외진출을 시작했다. 지난해 창업 21년 만에 매출 1조 원을 돌파했다. 매출의 99%가 해외에서 나온다. 변대규 대표(51)는 “터프한 국내시장보다 해외시장이 오히려 쉬웠다”고 말했다.


한국의 본 글로벌은 왜 해외로 나갈까. 안건준 크루셜텍 대표(47)는 ‘피할 수 없는 선택’이라고 말한다. 2007년 말 삼성전자는 크루셜텍이 개발한 옵티컬 트랙패드(OTP)를 이용해 ‘핑거마우스폰’이란 휴대전화를 만들었다. 본래 여름휴가용으로 내놓기로 했는데 삼성전자가 미적거리는 바람에 결국 연말에야 시장에 나왔다. 크루셜텍은 6개월 동안 기다리는 것 말고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대기업에 종속된 협력업체의 한계였다. 결국 안 대표는 제품설명서를 들고 블랙베리를 만드는 림(RIM)과 일본의 샤프를 찾아갔다.

삼성종합기술원 출신인 안 대표는 “한국에서 삼성에 납품하면서 굽실거리느니 해외에서 보란 듯이 성공한 제품을 들고 한국에 돌아오면 삼성전자도 우릴 다시 보리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제 크루셜텍의 제품은 RIM과 샤프는 물론이고 HTC와 모토로라 등 대부분의 스마트폰에 쓰인다. 그리고 안 대표의 말대로 국내 대기업도 크루셜텍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지문인식시스템 회사인 ‘슈프리마’의 이재원 대표(43)도 국내시장 상황이 암담해 절박한 심정으로 해외로 눈을 돌렸다.

2000년 5월에 창업한 이 대표는 회사를 차릴 때만 해도 수많은 투자 제의가 밀려들 거라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그땐 이미 벤처 버블의 끝물이었다. 기다려도 투자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소비자들의 반응도 냉랭했다. 이 대표가 택한 돌파구는 결국 해외였다.

“해외로 가겠다고 방향을 정했지만 역시 막막했습니다. 돈도, 브랜드파워도, 해외영업 경험도 없는 총체적 난국이었죠. 하지만 우리에겐 뛰어난 두뇌와 기술을 갖춘 ‘인재’가 있었습니다. 인터넷도 최대한 활용하기로 했습니다. 한 개의 잘 만든 홈페이지가 10명 이상의 해외 영업사원보다 나을 거라고 판단해 2003년 구글에 검색광고를 냈습니다. 이 업계에선 처음 있는 일이었죠.” 슈프리마는 이제 국내에서보다 해외에서 더 유명한 회사가 됐다.

○ CEO의 글로벌 마인드

“왜 글로벌이냐고요? 그냥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부강샘스 이성진 대표(41)는 2002년 미국 듀크대에서 경영학석사(MBA) 학위를 받고 존슨앤드존슨 프로덕트 매니저로 일했다. 이때 언제나 북미, 유럽, 아시아태평양을 어떻게 공략할지 계획을 짰다. 한국에 돌아와 침구 살균 청소기를 개발할 때도 자연스럽게 해외 소비자를 머릿속에 그렸다. 특허도 한국과 미국에서 동시에 받았다.

그러나 해외시장을 뚫는 건 쉽지 않았다. 영국 알레르기협회의 효과 인증을 받아야 했다. 두 달을 기다린 끝에 드디어 기회를 잡았다. 관계자를 만난 이 대표는 죽기 살기로 제품의 우수성을 설명했다. 그는 “미국 유학 시절 한 학기에 면접을 100번씩 하면서 영어로 요점을 설득력 있게 말하는 법을 배웠는데 그게 쓸모가 있더라”라고 귀띔했다.

해외 진출은 최고경영자(CEO)의 결정이다. 해외에서 공부하고 일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세계시장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 루트로닉의 황해령 대표(54)도 비슷한 경우다. 예일대를 나와 미국 회사에서 일한 그는 한국에서만 팔면 망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미국시장을 먼저 공략해야 경쟁사 수준의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고 믿었다”고 말했다.

‘글로벌 키즈’는 본 글로벌이 더 친숙하다. 세계적 소셜게임회사를 꿈꾸는 김동신 파프리카랩 대표(31)는 “싸이월드, 아이러브스쿨은 처음엔 혁신적이었지만 로컬 마인드로 시장에 안주하고 말았다”며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세계에서 승부를 볼 것”이라고 덧붙였다.
▼ ‘본 글로벌 기업’이란 ▼
작지만 강한 호주벤처들, 글로벌기업과 어깨 나란히…
1993년 맥킨지社가 명명


컨설팅회사 맥킨지의 호주 시드니 오피스는 1993년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작지만 높은 부가가치를 만들어 내는 호주의 제조회사들이 글로벌 플레이어와 당당하게 경쟁하고 있다는 점이다. 맥킨지는 이들을 ‘통상적인 해외진출의 룰을 깬, 본 글로벌 기업’이라고 칭했다.

맥킨지는 보고서에서 “대기업은 정보획득 비용이 비쌀 때 이점이 있지만 정보가 쉽게 이전되고 소비자가 빠르게 변하는 시장에서는 벤처기업도 경쟁력이 있다”며 “미래 경제성장의 상당 부분은 빠르고 혁신적인 작은 회사에서 나올 것”이라고 전망했다.

사실 본 글로벌에 대한 연구는 맥킨지 전에도 이뤄졌다. 국제신생벤처(INVs·International New Ventures) 등으로 달리 불렸을 뿐이다. 이런 기업들의 기준을 무엇으로 삼을지 정해진 것은 없다. 설립 후 2∼7년 이내 해외진출, 해외매출 비중 30∼50% 이상 등 학자마다 다양하다.

맥킨지가 예견한 대로 누구나 쉽게 정보를 얻게 되면서 소비자를 찾아 떠나는 본 글로벌이 늘었다. 2008년 영국 런던비즈니스스쿨은 케임브리지대 주변의 하이테크 클러스터 입주 기업 가운데 초기 국제화에 성공한 본 글로벌 12곳을 선정해 경쟁력을 분석했다. 연구진은 “영국은 규모가 큰 시장인데도 자사(自社)의 최신 기술을 팔 시장이 좁다며 해외로 나간 사례가 많았다”며 “본 글로벌은 해외에서 최신 기술과 동향을 배우고 더욱 뛰어난 결과를 내놓는다”고 밝혔다.

한국에서는 충남대 경영학과 김형준 교수가 본 글로벌을 본격적으로 연구했다. 김 교수가 1999년과 2000년에 설립된 서울·대전 지역 벤처기업 84곳을 설문조사한 결과 설립 5년 이내 해외진출, 해외매출 비중 50%를 달성한 기업은 절반에 조금 못 미치는 40%가량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평균적으로 설립 2.2년 만에 해외에 진출했다. 국내시장에 치중하는 다른 벤처기업들보다 지식 활용능력이 우수해 같은 연구개발(R&D)비를 투자하더라도 높은 생산성을 보였다.

김현수 기자 kimhs@donga.com 
김상훈 기자 sanhkim@donga.com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 한국의 ‘본 글로벌 기업’ 소개합니다 ::


동아일보 산업부는 벤처기업협회의 추천을 받아 한국의 본 글로벌 후보 기업 목록을 만들었다. 그런 다음 △해외진출 시기 △제품 개발 시 염두에 둔 시장 △CEO의 글로벌 마인드 △해외매출 비중 △매출 규모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한국의 본 글로벌 기업들을 선정해 차례로 소개할 예정이다.



0 개의 기사의견이 있습니다.댓글쓰기 Copyright ⓒ 동아일보 & donga.com
당신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

기사 의견 0개의 기사의견이 있습니다.
동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