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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오피니언

[글로벌 이슈/하정민]‘초콜릿 왕’과 ‘국민의 종’

입력 2022-01-26 03:00업데이트 2022-01-26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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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러 세력과 결탁했다는 혐의로 기소된 후 폴란드에 머물다 17일 전격 귀국한 페트로 포로셴코 전 우크라이나 대통령(왼쪽 사진)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현 대통령. 둘의 대립이 러시아의 침공 위협에 대처할 수 있는 국가 전체의 역량을 깎아먹고 있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는다. 키예프=AP 뉴시스
하정민 국제부 차장
러시아의 침공 위협으로 전운이 감도는 우크라이나가 전현직 최고권력자의 정쟁으로도 시끄럽다. 2019년 5월 퇴임 후 반역 혐의로 기소됐고 이웃 폴란드에서 사실상 망명 생활을 했던 페트로 포로셴코 전 대통령은 17일 전격 귀국해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현 대통령과의 일전을 선언했다. 그는 지지자 앞에서 “젤렌스키가 납세자의 돈을 훔쳐 영국과 이탈리아에 호화 주택을 보유했다. 위기에 빠진 조국을 구하러 왔다”고 주장했다.

포로셴코는 젊은 시절 제과회사 로셴을 창업한 후 자동차, 조선, 방송 등으로 사업을 확장해 조(兆) 단위 부자가 됐고 ‘초콜릿 왕’으로 불렸다.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강제 병합한 직후 치러진 2014년 3월 대선에서 그는 “성공한 기업가의 경험을 살려 국정을 운영하겠다”고 호언해 낙승했다. 그러나 고질적인 경제난은 나아지지 않았고 2019년 대선에서 정치 경험이 전무한 코미디언 출신의 젤렌스키에게 패했다.

젤렌스키는 평범한 역사 교사가 각종 난관을 뚫고 대통령이 된다는 내용의 드라마 ‘국민의 종’에서 주연을 맡아 선풍적인 인기를 끈 후 여세를 몰아 진짜 대통령까지 올랐다. 그는 취임 후 포로셴코가 집권 당시 친러 세력이 장악한 동부 돈바스 지역에서 분리주의자의 자금줄인 불법적인 석탄 판매에 관여했다며 기소했다. 포로셴코의 자산도 동결했다.

둘의 갈등 한복판에 젤렌스키와 마찬가지로 유대계인 금융 재벌 이호르 콜로모이스키가 있다. 포로셴코는 집권 중 콜로모이스키가 소유했지만 경영난에 처한 프리바트 은행을 국유화했다. 콜로모이스키는 “회생 가능성이 있는데도 정부가 재산을 강탈했다”고 주장한다. 포로셴코는 “콜로모이스키가 보복을 위해 젤렌스키를 후원하고 대통령에 앉혔다”고 맞선다. ‘국민의 종’이 콜로모이스키 소유의 방송국에서 방영됐고, 젤렌스키 내각에도 그의 측근이 대거 포진한 탓이다.

둘 중 누구 말이 맞건 양측 모두 부패와 실정(失政) 비판에선 떳떳하지 못하다. 포로셴코와 젤렌스키는 각각 세계 주요 인사의 역외 탈세를 폭로한 ‘파나마 페이퍼스’와 ‘판도라 페이퍼스’ 문건에 이름을 올렸다. 서로를 죽일 듯 으르렁대지만 조세회피처에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회사를 설립해 거액을 은닉한 행위는 약속이나 한 듯 같았다. 둘 중 누구 하나 경제를 살려내지도 못했고 크림반도를 넘어 우크라이나 전체를 손에 넣으려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위협을 막아내지도 못했다.

자신은 깨끗한데 상대방의 얼굴에만 똥이 묻었다고 주장하는 둘이 다투는 동안 그 피해는 고스란히 나라 전체가 지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 등은 포로셴코의 귀국 당일 젤렌스키가 서방, 러시아와의 다자 협상안이 아니라 참모들과 포로셴코 대응을 논의했다고 전했다. 나라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걸린 상황에서 안보보다 정적 대응을 우선한 셈이다.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 또한 전현직 지도자의 화합을 주문한 것을 알려졌다. 러시아와 싸우기도 바빠 죽겠는데 집안싸움은 나중에 하라는 경고인 셈이다.

1991년 옛 소련에서 독립한 후 우크라이나는 제대로 된 지도자를 가져본 적이 없다. 친러파 대통령 레오니트 쿠치마와 빅토르 야누코비치는 국민의 뜻에 반한 일방적 친러 정책을 펴다 각각 반정부 시위 오렌지혁명과 유로마이단으로 중도 퇴진했다. 친서방파 빅토르 유셴코와 포로셴코 또한 동부 지역을 장악하지 못한 채 사실상 반쪽짜리 대통령으로 지냈다. 또 친서방 행보로 푸틴의 불안감을 더 자극해 현재의 위기에 일조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심지어 친러파 지도자의 대부분은 러시아어가 모어(母語)이며 우크라이나어조차 잘 구사하지 못했다. ‘땋은 머리’로 유명하며 오렌지혁명을 주도해 친서방파의 기수로 불렸던 율리야 티모셴코 전 총리 또한 “30대 때 정계에 입문하기 전까지 우크라이나어를 사용해본 적이 없다”고 했을 정도다. 곳곳에 드리운 러시아의 입김이 이토록 강력한 상황에서 우크라이나는 스스로를 지킬 수 있을까. 전현직 대통령의 대립이 치열해질수록 주권 수호가 어려워질 것이란 점은 분명해 보인다.

하정민 국제부 차장 dew@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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