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임에 실패한 美대통령들의 굴욕사[정미경 기자의 청와대와 백악관 사이]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0월 21일 11시 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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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뒤숭숭합니다. 불안감의 원인은 패자가 될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과연 순순히 물러날까 하는 것입니다.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하며 안 물러나겠다고 버티지는 않을까요? 열성 지지자들이 들고 일어나 극도의 사회적 혼란을 야기하지는 않을까요? 최근 로이터통신 보도를 보니 불안감 때문에 미국인들의 총기 구매가 사상 최고치에 달했다고 합니다.

‘비운의 원텀(단임) 대통령이 될 것인가.’ 막바지에 이른 미국 대선 레이스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선거운동을 벌이고 있다. ABC뉴스
‘비운의 원텀(단임) 대통령이 될 것인가.’ 막바지에 이른 미국 대선 레이스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선거운동을 벌이고 있다. ABC뉴스


임기 4년, 1회 중임으로 총 8년 재임이 가능한 미국 대통령제에서 ‘단임(one-term)=굴욕’이라는 등식이 성립할 정도로 대통령에게나 국민에게나 큰 충격을 주는 사건입니다. 대통령 자신의 인생에서 단임이 낙인처럼 평생을 따라다닌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죠.

‘아버지 부시’로 통하는 조지 H W 부시 전 대통령은 재선 실패 후 “나는 단임 대통령이었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며 한동안 우울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합니다. 지금은 공화당이 상원 다수당이지만 2010년 소수당이던 시절 미치 매코널 원내대표는 당시 지지도가 높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가리켜 “내 목표는 그를 단임 대통령으로 만드는 것이다”라고 큰소리를 쳐 “저 사람 뭘 믿고 저런 말을 하는거냐”는 비아냥거림을 듣기도 했는데요. 그러자 오바마 당시 대통령은 “나는 늘어지는 8년을 보내느니 굵고 짧은 4년을 택하겠다”고 재치 있게 맞받아친 것은 유명한 일화입니다. 물론 오바마 전 대통령은 그 늘어지는 8년을 위해 열심히 재선 운동을 벌여 당선됐죠. 대통령에게 ‘8년의 유혹’은 말하면 입만 아픈 것이지요.

성공적으로 ‘8년 대통령’ 임무를 완수한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선거운동을 벌이던 당시 모습. 폴리티코
성공적으로 ‘8년 대통령’ 임무를 완수한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선거운동을 벌이던 당시 모습. 폴리티코


워싱턴 정가에서는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 ‘결단의 책상’을 가리켜 “저 자리에 앉아만 있으면 자동 8년”이라는 농담이 있습니다. 그만큼 현직 프리미엄이 절대적이라는 뜻이죠. 대통령이 일하는 듯한 모습만 보여줘도 언론이 척척 스포트라이트를 비춰주니 선거운동이 되는 셈입니다. 특히 ‘외롭고 고독한 최고결정권자 자리에 앉아본 경험’이라는 이미지 메이킹에만 성공하면 선거가 접전일 때 최고의 자산이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쉬워 보이는 ‘8년’에 성공하지 못한 대통령도 있습니다. 미 역사상 5명이 있는데요. 2명은 워낙 오래 전 분들이고, 현대 정치사에서는 제럴드 포드, 지미 카터, 아버지 부시 대통령 등 3명입니다. 이들은 어쩌다가 단임 대통령의 굴욕을 겪게 된 것일까요.

물론 이들이 단임 대통령이 된 정치적 배경은 각기 다르고 복잡합니다. 다만 대체적으로 보면 ‘경제 운영 실패’가 공통적인 원인입니다. 역시 선거는 경제가 좌우하지요. 또 다른 중요한 점은 이들은 최고결정권자로서 민심에 반하는 중대 결정을 내렸고, 재선 여부를 판가름하는 대선은 이에 대한 국민적 심판 성격이 컸다는 점입니다. 포드 전 대통령은 엄청난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임자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의 사면을 결정했습니다. 카터 전 대통령은 국민적 회의론을 뒤엎고 이란 주재 미국 대사관 인질 구출에 나섰다가 실패했습니다. 아버지 부시 대통령은 자신의 최대 세일즈 포인트였던 “내 입술을 읽으세요. 새로운 세금은 없습니다”라고 호언장담한 뒤 2년 반 만에 슬금슬금 세금을 올렸다가 거짓말쟁이 신세가 됐습니다.

‘실적 부진’으로 원텀 대통령으로 끝난 제럴드 포드, 지미 카터, 조지 H W 부시 전 대통령(왼쪽부터). BBC
‘실적 부진’으로 원텀 대통령으로 끝난 제럴드 포드, 지미 카터, 조지 H W 부시 전 대통령(왼쪽부터). BBC


좀 더 크게 본다면 단임 대통령은 ‘나는 국가를 이렇게 끌고 나가겠다’는 어젠다가 실종됐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비록 허황된 측면이 있고 세밀함이 부족하더라도 대통령은 비전을 제시해 국민을 안심시켜야 한다는 것이죠. 냉정하게 말해 국민은 이성적인 집단이기 때문에 떨어뜨릴만한 대통령을 떨어뜨린다는 겁니다.

그런데 비전을 제시하시에 4년은 너무 짧은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좀 일하다가 보면 4년이 후딱 지날 텐데 어떻게 국민을 감동시킬만한 어젠다를 준비해 정책을 마련할 시간이 있겠습니까. 4년마다 대선 치르느라 등골이 휜다는 4년 대통령제 반대론자들의 주장도 바로 이것이지요.

그렇다면 재선에 성공한 대통령들의 업적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8년 대통령의 업적을 분석한 자료들에 따르면 대부분의 굵직한 업적은 앞쪽 2년에 70~80%가 집중돼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재선 4년은 덤 4년”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지요. 대통령은 재선에 성공했다는 목표 상실감에 빠지고 야당은 공세 기술을 연마해 지루한 정국 대치가 이어지기 쉽다는 것입니다. 즉 어떤 대통령이던 실적과 비전은 앞쪽 1,2년에 집중돼 있기 마련이고, 단임 대통령은 이 같은 초반 집중도에서 뒤진다는 결론입니다.

임기 초 ‘오바마케어’(건강보험 개혁안) 철폐, 미국-멕시코 국경장벽 설치 등 주요 공약을 좌충우돌 식으로 추진하다 러시아 스캔들, 탄핵 정국 등으로 이어지면서 흐지부지돼버린 트럼프 대통령 역시 단임 대통령 정코스를 밟는 듯 보입니다. 풀죽은 단임 대통령의 뒷모습을 보는 것은 참 씁쓸한 일이죠. 그래도 초강력 팬덤을 가진 대통령이니 마지막 반전의 기회는 남아있을 듯 합니다. 열흘 좀 지나면 그 결과를 알 수 있겠지요.

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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