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이 짠 장기판 위의 말? 두 여성은 왜 김정남 암살자가 되었나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8월 2일 15시 1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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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월 13일 오전 9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이복형 김정남이 사람들로 북적이는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공항 한복판에서 피살됐다. 용의자로 지목된 이는 인도네시아 국적의 시티 아이샤와 베트남 국적의 도안 티 흐엉. 공항 폐쇄회로(CC)TV에 담긴 장면은 황당했다. 항공 스케줄을 체크하는 김정남에게 태연하게 다가선 두 여성은 그의 눈에 무언가를 묻힌 뒤 도망친다. 몇 분 후 김정남은 공항 직원에게 고통을 호소하지만 병원으로 이송되기 전 사망한다. 두 여성이 김정남의 눈에 문지른 물질은 맹독성 화학물질인 VX 신경작용제로 드러났다. 멀건 대낮 국제공항에서 벌어진, 너무도 대담했던 김정남 암살사건은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 북한이 짠 장기판 위 말이었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김정남 암살사건에 관한 정보는 여기까지다. 동남아시아 국적의 두 여성이 공항에서 김정남을 암살했다는 것. 그들이 어떻게 김정남의 암살에 가담하게 됐는지, 이후 두 여성은 어떻게 됐는지에 대해 아는 이는 많지 않다. 18일 개봉하는 다큐멘터리 ‘암살자들’은 사건의 전후를 치밀하게 추적해 가십처럼 소비된 암살사건의 전모를 밝힌다. 다큐를 연출한 라이언 화이트 감독(40)은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배우를 꿈꿨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길 바랐던 두 여성이 어떻게 암살에 가담하게 됐는지, 몰래카메라를 촬영한다는 북한 용의자들에게 속아 배우로 고용된 것뿐이라는 이들의 주장이 신빙성이 있는지를 추적한다.

화이트 감독은 “우리는 북한이 짜 놓은 장기판 위의 말이었다”는 주장의 진위를 밝히고자 다큐 제작을 결심했다. 지난달 28일 화상간담회에서 화이트 감독은 “암살사건이 발생했을 때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취임 첫 달이었던 때라 모든 기사의 헤드라인이 트럼프에 관한 것이었다. 김정남 암살사건은 미국 미디어에서 금세 자취를 감췄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는 사건으로 남았다”고 했다. 이어 “시티와 도안이 진실을 말하는 것인지를 추적하는 것만으로도 매력적인 다큐가 되겠다고 생각했다. 사건 발생 2017년부터 재판 종결 2019년까지 2년 간 매달 한 번씩 말레이시아를 방문해 재판과정을 따라갔고 두 여성의 변호사, 친인척 등을 만나며 영화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제작진은 ‘밝힐 수 없는 취재원’으로부터 사건 당시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의 CCTV 영상을 확보해 이를 다큐에서 최초로 공개했다. 자신들을 영화제작자라고 속인 북한 측과, 두 여성이 공항에서 만나는 장면부터 두 여성이 김정남에게 다가가는 모습, 이후 김정남이 공항 직원에게 몸의 이상을 호소한 뒤 링겔을 꽂고 몸이 쳐져 있다 사망에 이르는 모습, 두 여성이 화학물질을 씻기 위해 화장실로 향하는 모습까지 모든 과정이 다큐에 담겼다. 두 여성을 고용한 북한 대사관, 고려항공 직원 등 북한인 4명이 암살 당일 유유히 공항을 떠나는 장면도 확보했다. CCTV를 비롯해 변호인단으로부터 넘겨받은 두 여성과 북한 관계자의 문자메시지, 시티와 도안의 SNS 활동기록도 공개한다.

화이트 감독은 “영화의 진정한 성과 중 하나는 실제 증거를 기록했다는 점이다. 법정이나 언론에서 전혀 공개된 적 없는 증거”라며 “휴대폰 메시지, 페이스북 게시글, CCTV 화면 등 수많은 정보를 확보해 이를 다 봤는데도 두 여성은 자신들의 행동이 누군가에게 해를 가하기 위함임을 몰랐다는 게 확실해보였다. 그들의 암살에 대한 인지를 입증할 증거가 부재했다”고 주장했다.

● “범죄 희생양 된 두 여성의 삶에 주목”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독립을 해야 했던 시티, 배우를 꿈꿨던 도안. 친인척 인터뷰를 통해 두 사람의 유년시절, 성인이 된 이후 생계를 위해 고군분투했던 과정들도 담은 다큐는 취약계층 여성이 얼마나 쉽게 범죄의 희생양이 될 수 있는지로 이야기를 확장한다. “많은 돈을 벌고 유명해 질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지인, 택시기사의 제안으로 몰래카메라 제작에 동참하게 된 두 사람의 모습을 통해 유명세, 경제적 안정과 같은 제안 앞에 취약계층이 너무도 쉽게 흔들릴 수 있음을 지적한다.

화이트 감독은 “정치적인 부분도 있지만 두 여성의 삶이라는, 좀 더 예민한 이야기를 전달하고 싶었다. 사람들이 단순히 용의자로 여겼던 두 여성이 누구인지, 암살 전 어떤 이들이었는지, 어떻게 이 사건에 연루됐는지에 주목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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