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발 내딛기도 어려운 세상, 그래도 살아내야 한다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2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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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를 영화로 읊다]<5> 고단한 삶의 산수화

영화 ‘스틸 라이프’에서 빚에 팔려간 아내를 되찾기 위해 돈을 벌러 고향으로 돌아가는 한산밍의 쓸쓸한 모습 위로 철거 중인 건물 사이 위태로이 외줄을 타는 사람이 보인다. 위드시네마 제공
영화 ‘스틸 라이프’에서 빚에 팔려간 아내를 되찾기 위해 돈을 벌러 고향으로 돌아가는 한산밍의 쓸쓸한 모습 위로 철거 중인 건물 사이 위태로이 외줄을 타는 사람이 보인다. 위드시네마 제공
여기 가족을 이끌고 정처 없이 떠도는 중년의 남자가 있다. 그는 지금의 중국 충칭 일대 강변에서 의지할 데 없는 자신의 처지를 다음과 같이 썼다.

또 다른 중년의 남자는 고향을 떠나 가족을 찾아 떠돈다. 중국 자장커(賈樟柯) 감독의 ‘스틸 라이프’(2006년)에서 주인공 한산밍은 오래전 헤어진 아내와 딸을 찾아 싼샤 펑제로 온다. 두보(杜甫·712∼770)가 머물기도 했던 이곳은 싼샤댐 건설로 곧 수몰될 상황이다.

먼저 한시를 살펴보자. 이때 두보는 주변 관료와의 알력과 후원자의 죽음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장강을 따라 떠돌고 있었다. 1, 2행에서 풀-바람-언덕과 돛대-밤-배를 대비시키고 3, 4행에서는 별과 달이 상승과 하강하며 평야와 강물이 넓고 길게 펼쳐진다. 시인의 시선은 영화 카메라처럼 첫 두 행은 클로즈업으로 가까이에서 주목하고, 다음 두 행은 익스트림 롱샷으로 멀리서 조망한다. 시인이 설정한 이 정경 속에서 우리는 두보 내면의 고독과 만날 수 있다. 거대한 세계 수많은 타자 속에서 시인은 그저 미세한 풀이나 외로운 배 같은 무력한 단독자일 뿐이다. 5, 6행에서는 이렇게 된 이유가 자신에게 있다고 하지만, 짝을 이루는 ‘어찌’와 ‘응당’이란 말의 묘한 뉘앙스는 도리어 완강한 현실의 벽을 느끼게 한다.

이렇게 한시에서 두 행이 서로 짝이 되도록 구성하는 방식을 대우법(對偶法)이라고 한다.

영화에서도 남녀 주인공 각각의 이야기가 한시의 대우법처럼 짝을 이룬다. 떠나간 남편을 찾아 역시 싼샤 펑제에 온 션홍의 사연은 한산밍의 이야기와 짝을 이루어 담배-술-차-사탕이란 네 개의 단락으로 연결된다. 두보의 시도 2행씩 네 개의 연으로 구성되어 있다.

영화에서 한산밍은 오빠의 빚에 팔려 간 아내를 되찾기 위해 큰돈을 벌러 돌아가야만 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이 을씨년스러운 철거공사 현장을 떠나갈 때 갑작스럽게 외줄 타는 사람이 등장한다. 한 발 한 발 내딛기조차 어려운 그의 막막한 삶이 이와 같을까.

한시 역시 마지막 구절에서 떠도는 자신의 처지를 하늘과 땅 사이 한 마리 갈매기로 표현한다. 동일한 내용은 아니더라도 갈매기와 외줄타기란 이미지는 서로를 비추어주는 거울처럼 느껴진다. 가족을 되찾으려는 한산밍의 절박함과 가족의 생계를 위해 새롭게 진로를 모색해야만 하는 두보의 곤궁한 처지를 겹쳐 읽노라면, 한시와 영화가 서로의 고독과 고단함을 길어 올리는 마중물이 된다.

공교롭게도 한시와 영화는 모두 도도히 흘러가는 장강의 물길을 따라 이뤄졌다. 그래서 두 작품이 갈매기와 줄타기로 마무리되는 순간 고단한 삶의 산수화도 함께 완성이 된다. 세상의 격랑 속 그래도 살아내야 하는 우리들 역시 이 그림의 한 부분인 것만 같다.
 
임준철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스틸 라이프#두보#나그넷길의 밤 회포를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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