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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2/황윤정] 충무로 백여우(百女優)-엄앵란

입력 2010-03-04 17:06업데이트 2010-04-26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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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의 로맨스를 현실로…영화배우 스타 커플의 원조 장동건 고소영 커플이 성대한 결혼식을 눈앞에 두고 있다.

그런데 기시감이 든다. 젊은 사람이라면 최근 급증한 연예인 커플의 연장선으로 받아들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영화판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라면 기억의 필름을 아주 오래 전으로 되돌릴 수도 있다.

'무려' 45년 전에 벌어진 신성일 엄앵란 커플의 결혼식이 바로 그것이다. 쉰 살이 넘은 사람에겐 장동건 고소영 커플은 '신-엄'의 화려한 이벤트 이후 반세기반에 벌어지는 말 그대로 '세기의 결혼'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다.
1964년 워커힐 호텔에서 열린 신성일 엄앵란 결혼식. 주례는 당시 공무부 오재경 장관.

● 반세기 전 사상 최고의 이벤트 '신-엄' 결혼

1964년 11월14일, 서울 광장동 쉐라톤 워커힐 호텔.

경찰 공식 추산만 4000명에 달하는 군중이 몰려들었다. 그들의 입에서는 기쁨과 설렘, 안타까움이 뒤섞인 환호와 탄성이 쏟아졌다. 당대 최고의 톱스타 신성일과 엄앵란의 '세기의 결혼식'이 이날 치러진 것이다.

결혼식은 아직까지도 한국 연예 사상 가장 성대했던 결혼식으로 세인의 입에 오르내릴 정도. 주례는 당시 공무부(현재 문화부) 오재경 장관이 맡았고, 드레스와 턱시도는 떠오르는 샛별 앙드레 김이 제공했다(놀랍게도 오늘날까지도 앙드레 김은 연예인 단골 드레스 디자이너다).

당시만 해도 서울의 한적한 외곽에 속했던 워커힐 호텔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였는지, 결혼식에 운집한 군중들이 잃어버린 신발만 해도 '한 구루마'가 됐다는 전설을 남겼다.

1960년에 신성일의 데뷔작이기도 한 신상옥 감독의 '로맨스빠빠'에서 처음 만난 두 사람은 이후 '맨발의 청춘(1964년)'과 '동백아가씨(1964년)' 등의 영화에서 호흡을 맞추며 충무로 최고의 커플 연기자로 꼽히다가 결국 부부의 연을 맺어 세상을 놀래켰다. 실제 이들은 대한민국 공식 연예인 커플 1호로 기록됐다.

그 시대 최고의 청춘스타이자 대중의 로망이었던 이들의 결혼 소식은 기사가 실린 신문과 잡지가 모두 동이 날 정도로 전 국민적 관심과 인기를 끌었고, 결혼 생활 4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스타 커플의 대명사로 회자되고 있다.

요즘의 젊은 관객들에게 엄앵란은 잘 생긴 남편을 둔 탓에 힘들었던 개인사가 더 많이 알려지며, 전형적인 조강지처나 후덕한 어머니의 모습으로 인식될 뿐이다. 요즘은 방송에 나와 상담을 하거나 수다를 풀어놓는 할머니 방송인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1960년대에 그녀는 청초하고 새침한 모습으로 많은 사랑을 받던 은막의 히로인이었다.
영화 \'노을진 들녘\'(1965년), 영화 \'맨발의 청춘\'(1964년) 영화 \'동백아가씨(1964년) 포스터.


●후덕한 할머니 방송인? 60년대 한국 영화의 정점

여기서 잠깐, 영화배우 엄앵란의 눈부시던 젊은 시절로 돌아가 보자.

엄앵란은 1936년에 클라리넷 연주자인 아버지와 무용가 출신 영화배우였던 노재신 여사 사이에서 서울 토박이로 태어났다.

노 여사는 1930년대부터 60년대에 활동했던 연기력과 미모를 겸비한 원로 영화배우였다. 교과서에 등장하는 나운규 감독과 '오몽녀'를 찍기도 했고 유현목 감독의 명작 '오발탄'에서 병든 노모 역할로 마지막 필모그래피를 채우기도 했다.

예술가 집안의 피와 끼를 물려받은 그녀는 숙명여대 가정학과 1학년에 재학 중이던 1956년, 스무살 나이로 은막 여주인공으로 발탁됐다. 당시 '단종애사'(감독 전창근)를 준비 중이던 영화사에 어머니를 따라 놀러갔다가 이뤄진 전격 캐스팅이었다.

이후, 엄앵란은 연기생활을 한 10여 년 동안, 무려 160여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이는 그녀가 활동을 했던 1960년대가 연간 수백편의 영화가 만들어질 정도로 한국영화 최고의 중흥기였기에 가능했던 작품 수치였고, 그 정점에 바로 그녀가 서 있었다.

그러고 보면 영화스타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산업적인 기반이 밑바탕이 돼야 한다는 점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통계이기도 하다.
결혼생활 이후 남편과 함께 영화 천하일색 말괄량이(1970년)에 출연한 엄앵란(위), 데뷔작이던 '단종애사'(1956년, 아래 가운데)와 '독립협회와 이승만'(1959년, 오른쪽)


● 1960년대의 김태희, 영화배우 엄앵란

그녀가 유달리 주목을 받은 점은 우리나라 최초의 학사 여배우였다는 점일 것이다.

오늘날로 따지면 아마 '김희선' '김태희'급 이상이라고 하면 이해가 될까?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 아름다운 데다 솔직하고(때로는 발칙하고), 대담하고 거침없는 발랄한 여대생의 역할을 많이 소화해 냈는데, 이를 토대로 지적인 배우라는 평과 더불어 우리나라 영화 속 패션의 시작을 알리는 '패셔니스타 1'호로 주목 받기도 했다.

그러던 중, 영화 '로맨스빠빠(1963년)'에서 1살 연하의 신인배우 신성일을 만나게 됐고, 그 후 '아낌없이 주련다(1963년)'가 청춘영화 시대의 포문을 열면서 엄앵란, 신성일은 함께 주연을 맡은 '맨발의 청춘(1964년)'이 상징하듯 우리 영화사상 전무 무후한 황금의 콤비스타로 가장 긴 커플 톱스타 시대를 이끌어냈다.

어느새 충무로에서는 '엄앵란과 신성일만 출연하면 무조건 히트한다'는 흥행공식이 만들어졌다. 이어 스크린의 로맨스를 현실로 이어가며 결혼에 골인, 일과 사랑에서 동시에 숙명적인 동반자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엄앵란은 결혼 후, 아기엄마가 되면서 은막을 떠나게 된다. 이는 시대가 요구한 여성의 조건이기도 했다. 충무로에서 모습을 감춘 후, 그녀는 신성일의 아내이면서 아들 하나와 딸 둘을 키우는 어머니로 가정이란 울타리 안에 들어앉았다.

그러나 너무 잘 생겨서 '바람 잘날 없던' 미남배우의 조강지처로, 때론 정치인의 아내로, 인고의 세월을 보내면서 배우로서의 삶보다 더 많은 아픔과 기쁨을 겪어야 했다.

그리고 45여 년이 지난 지금, 그녀는 '어릴 때는 말도 못할 만큼 숫기가 없었다. 데뷔 초 조명이 뜨겁다는 말도 못해서 쓰러지기까지 했다'는 고백이 무색할 정도로 입담 좋은 중견 방송인으로 변신에 성공했다.
장동건 고소영이 함께 출연한 영화 '연풍연가'(1999년)

● 이제는 대중에게 편안함 주는 현실 속의 방송인

추억 속의 아름다운 여배우가 현실로, 그것도 가장 현실적인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일흔을 넘긴 그녀는 아내로서, 엄마로서 겪은 경험에서 비롯된 삶의 농축된 이야기들을 꾸밈없이 특유의 입담과 너스레로 승화시켜 쏟아내고 있다. 그리고 사업가로도 여전히 젊고 건강하게 활동을 영위하고 있다.

억척 할머니 느낌으로 인생의 3막을 펼쳐나가는 그녀의 현재도,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나가는 한 사람으로서, 또한 한 노배우로서 분명히 그 의미가 크겠지만, 그럼에도, 다시 한 번 그녀의 연기가 보고 싶은 아쉬움은 필자 혼자만이 가진 것일까?

이들의 화려한 결혼식 이후 무려 45년 간, 이 두 은막 배우의 결혼에 필적한 만한 이벤트는 재현되지 못했다.

아마도 5월이면 당대 최고의 미남-미녀 톱스타 커플(이 되리라 예상되는), 장동건 고소영 커플이 역사와 신화에 도전하는 셈이 된다. 톱스타 커플 마케팅의 막을 연 신성일 엄앵란, 그리고 그 정점을 찍을 것으로 예상되는 장-고 커플은 과연 어떤 행로를 갖게 될지 흥미진지해지는 대목이기도 하다.

황윤정 영화 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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