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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경제

‘한국 경제학 거목’ 조순 전 경제부총리 별세…향년 94세

입력 2022-06-23 09:17업데이트 2022-06-23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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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7년 서울 관악구 봉천동 소천서사에서 동아일보 기자와 인터뷰하고 있는 고 조순 전 경제부총리 2017/06/26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한국 경제학계의 거두(巨頭)이자 관료, 정치인으로 명성을 남긴 조순 서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가 23일 새벽 3시 38분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4세.

고인은 노태우 정부 시절(1988~1993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과 한국은행 총재를 지냈고, 김영삼 정부 때인 1995년 서울시장에 당선되면서 행정가로 변신했다. 시장 역임 후에는 민주당과 한나라당 총재로 정치에 입문했다. 교수와 정치인, 행정가, 관료 등 다양한 직책을 맡아 오며 대한민국의 역사와 굴곡을 함께 했다.

1928년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난 고인은 경기고, 서울대 상대를 졸업했다. 육군사관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다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캘리포니아대 버클리 경제학 박사를 받고 서울대 경제학과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고인은 ‘조순학파’로 일컬어질 정도로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하며 한국 경제학계에 획을 그었다. 1974년 케인즈 경제학을 본격적으로 다룬 최초의 교과서인 ‘경제학원론’을 펴냈다. 이 책은 정운찬 전 국무총리, 전성인 홍익대 교수, 김영식 서울대 교수 등이 차례로 개정판에 공동저자로 참여하면서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경제학의 대표적인 교과서로 읽힌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부탁을 받고 높은 인플레이션, 중화학공업에 치우친 산업정책, 민간 경제활동 통제 등에 대한 비판을 담은 보고서를 작성했지만 10·26 사태로 박 전 대통령이 숨을 거두면서 빛을 보지 못했다. 이 미공개 보고서는 지금까지도 당시 경제문제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과 해법을 담고 있어 높은 평가를 받는다.

평생 학자로 살 것 같았던 고인은 노태우 전 대통령과의 인연으로 ‘현실 참여형 학자’로 변신했다. 육사 영어 제자였던 노 전 대통령의 권유로 1988년에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을 맡았다. 1992년부터 1년 간 한국은행 총재를 역임했지만 중앙은행의 독립성 문제를 두고 정부와 갈등을 빚다가 사표를 냈다. 이후 인기에 영합하지 않는 ‘대쪽 학자’ 이미지를 갖게 됐다.

정계에 발을 디딘 것은 1993년 당시 아태평화재단 김대중 이사장의 권유였다. 재단 자문위원을 맡아 활동한 고인은 이후 민주당에 입당해 서울시장 선거에 나섰다. 길고 흰 눈썹과 그 동안의 대쪽 행보가 강조되면서 ‘서울 포청천’ 별명을 얻었다.

1995년 첫 민선 서울시장에 당선됐고 첫 출근길에 종로구 혜화동 공관에서 시청까지 버스를 타는 등 ‘소통’을 강조했다. 취임 직전 벌어진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를 수습한 이후 당산철교를 철거하고 재시공하는 등 ‘안전 서울’ 행정에 주력했다. 당시 아스팔트로 덮여있던 여의도광장을 나무가 우거진 여의도공원으로 조성한 것도 그의 아이디어였다.

시장 임기를 10개월여 남겨두고 통합민주당 대선 후보로 영입돼 대권에 도전했다. 하지만 국민회의 김대중, 자민련 김종필 후보 등에 비해 군소정당 후보로서의 한계에 부딪히자 신한국당 이회창 후보와 전격 단일화하면서 대선은 완주하지 못했다. 대신 초대 한나라당 총재를 맡았다. 한나라당이라는 이름도 그가 직접 지은 것이다. 1998년 강원 강릉 재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돼 여의도에 입성했다. 2000년 16대 총선에서 민주국민당 대표로 총선을 지휘했지만 선거 참패 후 정계를 떠났다.

이후 정치판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지만, 최근 한국의 정치상황에 대해서는 안타까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조 전 부총리는 2016년 4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생선은 몸통보다 머리가 먼저 썩는다”며 “책임지지 않는 제도와 의식으로는 정치가 제대로 될 수 없다”고 꾸짖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직후에는 “이제는 국가를 새로 만드는 리빌딩 과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그의 길고 빽빽한 흰 눈썹과 번뜩이는 눈빛을 기억한다. 누군가는 그런 그를 일컬어 ‘백미(白眉·여러 사람 가운데 가장 뛰어난 사람)’라고 했고, 판관포청천이라는 대만 드라마가 한창 인기일 때는 ‘서울 포청천’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다. 하얀 눈썹을 휘날리며 산행을 즐겼던 탓에 ‘산신령’이라고도 했다. 그는 산신령이라는 별명을 가장 좋아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남희 씨(92)와 장남 기송, 준, 건, 승주 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 아산병원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25일이다.

세종=최혜령 기자 herstor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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