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솟는 물가에 멀어지는 ‘파이어족’ 꿈[데이터톡]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5월 29일 10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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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a Talk
데이터가 나 자신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시대, 흩어져 있는 데이터를 모으고 씨줄날줄 엮어 ‘나’와 ‘우리 사회’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정보를 만들어 전달해 드리는 동아일보 온라인 전용기사입니다. 재미는 덤~.


요새 점심 회동을 하려면 1인 당 얼마 정도 예산을 잡으면 적당할까요? 서울 시내에선 점심 먹고 커피 한 잔 하려면 1만5000원도 부족할 것 같네요.

인플레이션은 화폐가치를 조금씩 떨어뜨려 ‘조용한 도둑’이라고도 불립니다. 지금의 100만 원이 10년 뒤 100만 원의 값어치를 하지 못한다는 것이죠. 은퇴 후 쓰려고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목돈을 모으고 있는데 예상치 못한 물가상승률에 내 돈의 가치가 뚝뚝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해 적금 붓기도 꺼려진다는 사람이 많습니다.

클립아트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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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처럼 높은 물가상승률은 10년 뒤, 20년 뒤 내 돈의 가치를 얼마나 잠식할지, 목돈의 가치가 떨어진다면 돈벌이는 과연 몇 살까지 계속해야 하는 것인지 데이터톡이 따져봤습니다.

● 지금 1억 원은 10년 후 얼마의 가치?


지난 10년 간 평균 물가상승률은 1.4%였습니다. 10년 전 목돈 1억 원을 예금 금리 2%로 은행에 넣어놓았다면(보통 현금 1억 원을 금고에 넣지 않고 은행에 넣어 두니까 예금 금리 만큼 투자수익률이 있다고 가정합니다) 10년 전 1억 원의 실질가치는 지금 1억608만 원이 되어있겠죠.



실질가치가 뭐냐고요?
1년 전 월급이 300만 원, 생활비도 300만 원이었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 그런데 1년 뒤인 현재 물가가 10% 올라서 생활비가 330만원이 들게 됐습니다. 월급은 여전히 300만원입니다. 생활비를 감당하려면 어디서 30만 원을 빌려야 하겠죠. 1년 전 300만 원 몫을 하던 월급이 이제 그만큼의 몫을 하지 못하게 됐습니다. 내가 가진 돈의 액수는 달라지지 않더라도 물가상승에 따라 구매할 수 있는 재화가 줄어들면 돈의 가치가 그만큼 떨어지게 됩니다. 이렇게 물가상승률을 감안한 돈의 가치를 실질가치라고 합니다.


그런데 1억 원의 실질가치는 물가상승률이 금리(투자수익률)보다 높아지는 순간부터 줄어들기 시작합니다. 물가상승률이 1.4%보다 1%p 높은 2.4% 수준이라면 지금 1억 원의 실질 가치는 10년 뒤 9616만 원, 20년 후에 9247만 원, 30년 후에는 8892만 원이 됩니다.

IMF는 올해 한국의 물가상승률이 4%가 될 것이라고 예측했죠. 극단적인 가정이긴 하지만 물가상승률이 계속 4%를 유지한다면 지금 1억 원은 10년 후 8235만 원, 20년 후 6782만 원, 30년 후 5585만 원이 됩니다. 가만히 있어도 내 돈의 절반이 사라지는 셈입니다.

● 35세에 5억 원 있어도 파이어족 불가능


물가가 치솟으면 돈벌이를 계속해야 하는 기간도 길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싱글이라면 적게는 5억 원의 금융자산만 모아도 퇴직이 가능하다는 얘기가 있는데, 데이터톡이 미래에셋 ‘투자와연금센터’와 시뮬레이션해 본 결과 35세에 5억 원이 있어도 물가상승률이 2.4%를 넘어가면 파이어족(30대 후반~40대 초반 은퇴)이 되는 건 불가능했습니다.

현재 35세인 싱글인 A가 5억 원의 자금을 모아 연 4%의 투자수익을 올릴 수 있는 곳에 넣어놓았다고 가정해 봅니다. 사망 예상 시점은 84세(한국인 기대 수명, 2020년), 은퇴 후 예상생활비는 월 165만 원(국민연금연구원, 2020년)입니다.

옆의 그래프를 보죠. 물가상승률이 1.4%인 경우 A는 38세에 일을 그만둬도 다른 이에게 손 벌리지 않고 살 수 있습니다. 38세 이후부터는 사망 시점까지 필요한 생활비의 총액(주황색 선)이 내 자산의 가치(파란색 선)보다 적게 되기 때문이죠.

‘내 자산의 가치’(파란 선)가 ‘필요한 생활비 총액’ 선과 만나는 곳이 퇴직 가능한 시점.
‘내 자산의 가치’(파란 선)가 ‘필요한 생활비 총액’ 선과 만나는 곳이 퇴직 가능한 시점.


하지만 물가상승률이 높아질수록 생활비 총액선이 ‘내가 모은 돈의 가치’ 선과 만나는 지점은 점점 뒤로 밀립니다. 물가상승률이 2.4%라면 초록선과 파란선이 만나는 45세에야 은퇴가 가능합니다. 40대 초반에 파이어족이 되겠다는 꿈은 이미 물 건너갔습니다. 물가상승률이 3.4%라면 55세에, 물가상승률이 4%라면 60세에나 퇴직할 수 있습니다.

30세 싱글이면서 금융자산 3억 원을 모은 B의 사례를 하나 더 생각해보겠습니다. B는 A보다 나이가 적어 앞으로 살아갈 날이 A보다 더 많은데 모아놓은 돈은 A보다 적기 때문에 퇴직 가능한 시점이 A보다 늦습니다.

물가상승률이 1.4%인 경우 B는 48세에 은퇴할 수 있지만 물가상승률이 2.4%이라면 57세에, 3%라면 66세에 은퇴가 가능합니다. 물가상승률이 4%라면 70세나 퇴직하겠네요. 30세에 3억 원이 있어도 조기은퇴는 불가능한 셈입니다. ( ̄ヘ ̄;)



●WSJ, “살인적 물가에 4% 법칙 흔들”


최근 미국 월스트리트 저널은 은퇴자들이 수십 년 간 안전한 공식으로 여겨오던 4% 법칙이 흔들리고 있다‘는 기사를 내놓았습니다.(’Cut Your Retirement Spending Now, Says Creator of the 4% Rule‘, 2022년 4월19일)

4% 법칙이란 은퇴 첫해에 노후자산의 4%를 꺼내 쓰고 이듬해부터는 물가상승률을 반영한 금액만큼 조금씩 늘려 꺼내 쓰면 최소 33년 간 자금고갈 걱정 없이 살 수 있다는 것으로, 1994년 미국의 재무 전문가 빌 벤젠이 만들었습니다.

빌 벤젠은 월스트리트 저널과의 이번 인터뷰를 통해 1926년 이후 지금까지 4% 법칙이 유효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며 “현재의 물가 급등이 장기적 추세인지 아닌지에 대해 판단이 설 때까지는 더 조심스럽게 지출할 것을 권한다”고 말했습니다. 지금 같이 유례없는 높은 인플레이션 상황 아래서는 매달 노후 자산의 4%보다 적게 꺼내 써야 할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이에 앞서 미국의 투자조사 전문기관인 모닝스타는 인출액을 3.3%로 낮춰야 노후 30년이 안전할 것이라는 보고서를 내놓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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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셋 투자와연금센터의 시뮬레이션이나 벤젠의 이야기를 종합해 볼 때 지금 같은 인플레 상황 아래서는 허리띠를 더 졸라매거나 더 오래 돈벌이를 할 궁리를 해야 한다는 결론이 내려지네요.

국내 자산관리 전문가들은 현재와 같은 3~4%대의 물가상승이 일시적일 것으로 내다보고 있는데요, 적어도 물가상승에 기름 붓는 일들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김현지 기자 nuk@donga.com
임보미 기자 bo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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