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생일선물 대신 ‘기부내역’ 달라고 한 이건희 회장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4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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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열사 사장단의 선물 사양하며 “이웃 도운 내용 적어주면 좋겠다”
23년간 특별한 ‘메모선물’ 받아… 文 ‘이건희 컬렉션 특별관’ 지시

“진심을 담아 불우이웃을 돕고, 그 활동 내용을 적어 나에게 생일 선물로 주면 좋겠다.”

1991년 1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사진)이 당시 삼성 사장단에 이같이 당부했다. 1987년 회장 취임 이후 관례처럼 이 회장의 생일인 1월 9일마다 선물을 보내자 선물 대신 기부 활동을 적어 달라고 한 것이다. 임직원들이 자발적인 기부를 늘렸으면 하는 바람을 전한 것이다.

이후 삼성 사장단은 2014년 이 회장이 급성 심근경색으로 쓰러지기 전까지 23번의 1월 9일마다 ‘축 생신(祝 生辰)’이라고 적힌 봉투를 이 회장에게 전달했다. 봉투를 열면 늘 임직원들의 이웃돕기 활동이 적혀 있었다.

29일 재계 관계자는 “마지막이 된 2014년의 편지에는 ‘많은 임직원들이 신경영 20주년 특별격려금의 10%를 기부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어 더욱 표정이 밝으셨다”며 “삼성 일가가 역대급 기부 사례를 남긴 것은 고인의 뜻을 잇겠다는 의지일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이 회장은 생전에 매번 특별한 ‘생일 선물’을 손꼽아 기다렸고, 이 선물을 받은 뒤에는 어김없이 활짝 웃으며 어린아이처럼 기뻐했다는 게 유족과 주변 지인들의 전언이다.

앞서 삼성 일가가 감염병 극복 등에 1조 원, 미술품 2만3000여 점 기증 등 사상 최대 규모의 사회 환원을 발표하면서 이 회장의 사회공헌 철학이 담긴 일화들이 주목을 받고 있다. 유족들은 “고인의 유지를 받들어 지속적으로 사회적 책임을 다할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한편 청와대에 따르면 문재인 대통령은 28일 참모진 회의에서 ‘이건희 컬렉션’ 기증에 대해 “동서양 걸작을 감상할 수 있게 돼 너무나 고맙고 자랑스럽다. 기증한 정신을 잘 살려서 국민들이 좋은 작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별도의 전시실을 마련하거나 특별관을 설치하는 방안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삼성家, 해운대 임야 3만8000㎡도 기부… 뒤늦게 알려져
29일 재계에 따르면 삼성 일가는 상속세 납부 및 신고 기한인 30일을 앞두고 기부의 형식과 내용을 일찍부터 고민해 왔다고 한다. 1987년 회장에 취임하면서부터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해온 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뜻을 기리면서도 과도한 세간의 관심을 우려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회장이 “남이 모르게 ‘음덕’을 쌓듯 어려운 이웃을 찾아 도우라”고 당부해 왔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유족은 주요 기부 관련 내용만 대규모 사회 환원 발표에 넣기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회장의 유산 가운데 부산 해운대구 장산산림욕장과 장산계곡이 위치한 임야 3만8000m²를 부산 해운대구에 기부하기로 한 것도 이날 해운대구가 밝히면서 알려졌다.

해운대구에 따르면 해당 임야는 해운대구가 장산구립공원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던 곳이었다. 유족들이 이 같은 해운대구의 바람을 전해 듣고 구립공원을 만들어 산림을 보존해야 한다며 기부를 결정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날 홍순헌 해운대구청장은 “토지를 기부해준 이건희 회장 유족들에게 감사하다. 미래 세대를 위해 생태계와 산림 보전, 장산구립공원 지정에 더욱 힘을 쏟겠다”고 밝혔다.

이 회장이 평소 의료, 과학 분야와 어린이 교육에 집중적으로 지원해 온 점도 회자되고 있다. 유족들이 이번 1조 원 기부처로 의료 분야를 정한 데다 그중 어린이병원 지원에 3000억 원을 기부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2013년 새해 첫날, 삼성 사장단이 이 회장의 서울 한남동 자택을 찾자 이 회장이 대뜸 “국가 미래기술을 위해 크고, 담대하게 지원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삼성은 그해 향후 10년 동안 기초과학 분야 등의 혁신적인 연구에 총 1조5000억 원을 지원하는 ‘삼성미래기술육성사업’을 시작한다고 밝혔다. 또 이 회장은 1997년 펴낸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 에세이에서 “이제는 더 실질적인 어린이 교육에 소매 걷고 나서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이 회장이 직접 쓴 이 에세이집의 수익금도 불우이웃돕기 헌금으로 기부됐다. 이 회장 측은 1997년 12월 당시 출간 한 달 만에 1차분 인세 1억7638만 원을 헌금으로 내며 “좀 더 시간을 두고 성금을 모아 기탁하려 했으나 (외환위기가 닥친) 경제 현실이 급격히 악화돼 우선 12월 26일까지 판매분 27만8000부에 대한 인세를 먼저 기탁한다”고 밝혔다.

재계에서는 유족이 “사회 환원 사업을 지속적으로 이어가겠다”고 한 만큼 향후 다양한 사회공헌 활동이 이어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한국을 대표하는 경영인이 끊임없이 사회에 기여하는 새로운 선례를 남겼다”고 말했다.

김현수 kimhs@donga.com·황형준 기자
#이건희#기부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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