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복 매장 거의 사라질지도…” 줄줄이 파산하는 정장기업, 왜?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8월 14일 17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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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신사복 매장은 거의 사라질지도 모른다.”

의류 브랜드 유니클로의 창업자 야나이 다다시(柳井正·71) 패스트리테일링 회장은 “생활양식이 변화해 정장은 대부분의 사람들과 상관없는 것이 됐다”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7일 아사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10년 치 변화가 1년 동안 온 느낌”이라며 사례 중 하나로 “사람들의 스타일이 단숨에 캐주얼화한 것”을 꼽았다. 야나이 회장은 아버지가 운영하던 시골 신사복 매장을 물려받아 세계적인 브랜드를 일궈낸 인물이다.

국내외에서 남성 정장 시장이 몇 년째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직장 내 자율복장제의 영향으로 업무 현장에서도 격식 없는 차림이 각광을 받고 있다. 특히 코로나19가 확산되면서 이러한 경향이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경기가 침체되면서 비즈니스 기회가 줄어든 데다 재택근무, 비대면 회의의 확산으로 정장이 설 자리가 좁아지고 있어서다.

● 글로벌 정장기업 줄줄이 파산


‘정장의 시대는 끝났다’는 야나이 회장의 진단처럼 코로나19 사태 이후 실제로 글로벌 정장 전문 의류기업의 파산 신청이 잇따르고 있다.

외신 등에 따르면 202년 전통의 미국 남성 정장 브랜드 ‘브룩스브러더스’가 8일(현지 시간) 코로나19 사태의 여파로 파산보호를 신청했다. 1818년 문을 연 브룩스브러더스는 에이브러햄 링컨부터 존 F 케네디, 빌 클린턴, 버락 오바마, 도널드 트럼프 등 미국 역대 대통령이 즐겨 입었던 브랜드로 알려져 있다. 북미에만 200여 개, 45개국에 500여 개 매장을 가진 대형 브랜드이지만 최근 코로나19로 인한 매출 급감, 임대료 부담으로 경영난을 겪어 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달 2일에는 미국 남성 정장 프랜차이즈 ‘멘즈웨어하우스’, ‘조스 에이 뱅크’ 등을 보유한 ‘테일러드 브랜즈’도 파산보호를 신청했다. 북미 지역에만 매장이 1400여 개인 이 회사는 6월 초 기준 부채 규모가 10억 달러(약 1조1800억 원)를 넘어섰다.

● 국내 남성복 시장 8년 새 반 토막


국내 시장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섬유산업연합회에 따르면 2011년 6조8668억 원 규모였던 국내 남성복 시장은 지난해 4조582억 원으로 41% 급감했다. 8년 동안 시장 규모가 해마다 평균 6%씩 줄어들었다. 전체 패션 시장에서의 비중 역시 2001년 24.8%에 비해 15.1%포인트 하락한 9.7%에 그쳤다. 한국섬유산업연합회는 “앞으로도 남성 정장 시장이 지속적으로 축소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백화점 등 유통 채널에서 소비 위축도 두드러진다. 신세계백화점에 따르면 신사정장 품목의 전년 대비 매출 신장률은 2016년 ―8.4%, 2017년 4.8%, 2018년 ―1.9%, 2019년 ―16.4%로 역신장하는 추세다. 코로나19가 있었던 올해는 매출이 23.5%나 줄었다. 현대백화점 또한 남성 정장 매출이 3년 연속 감소세다. 수입 고급 정장 브랜드가 포함된 갤러리아백화점 명품관의 남성클래식 카테고리 매출도 전년 대비 20% 감소했다. 갤러리아백화점 관계자는 “코로나19로 인해 결혼식 등 각종 행사가 취소된 영향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매출이 하락하면서 점포 내 정장 매장의 비중도 줄어들고 있다. 현대백화점은 2018년 기준 전국 80개였던 남성 정장 브랜드 매장이 올해 상반기(1~6월) 67개로 줄었다. 서울 롯데백화점 영등포점은 최근 점포를 새로 단장하면서 정장·셔츠 상품군 매장의 면적을 20% 줄였다. 그 대신 플라모델, 레이싱카, 정보기술(IT) 제품 등 남성 고객을 사로잡을 수 있는 다른 매장으로 대체하고 있다. 부산 해운대구 롯데백화점 센텀시티점에서도 정장 브랜드가 퇴점한 자리에 미니카, 플라모델 전문 매장 ‘타미야’를 열기로 했다.

패션기업은 정장 브랜드 통폐합에 나섰다. 최근 5년간 주요 패션기업이 운영하다 철수한 신사복 브랜드만 ‘빨질레리’, ‘타운젠트’, ‘일레븐티’ 등 최소 5개가 넘는다. 오프라인 사업을 철수하고 온라인에서만 전개하는 브랜드까지 합치면 더 많은 정장 브랜드가 자취를 감춘 셈이다. 롯데백화점의 자체 제작(PB) 셔츠 브랜드인 ‘헤르본’도 최근 출시 14년 만에 문을 닫았다.

● 전통 정장 브랜드도 캐주얼 제품 늘려


패션기업은 이런 소비 경향을 반영해 정장 전문 브랜드에서도 캐주얼 라인의 비중을 대폭 늘리고 있다. 브랜드가 쌓아올려 온 헤리티지는 유지하면서도 품목을 다변화해 소비층을 두껍게 하겠다는 전략이다.

삼성물산 패션부문의 신사복 브랜드 ‘갤럭시’는 최근 몇 년간 캐주얼 스타일의 비중을 70%까지 늘렸다. 정장에 기능성과 스포티즘을 더한 ‘뉴 테일러링’을 내세우며 낯선 젊은 소비층을 끌어들이겠다는 취지다. 코오롱FnC의 ‘캠브리지 멤버스’ 역시 캐주얼 라인을 지속적으로 확장하고 있다. 올해 가을겨울(FW) 시즌에는 캐주얼 아이템의 구성비를 전년 대비 1.5배 늘릴 예정이다.

해외 브랜드도 마찬가지다. 전통 슈트를 선보이는 이탈리아 고급 수제 정장 브랜드 ‘키톤’, ‘브리오니’ 역시 최근에는 정장 품목의 비중을 40%로 줄이고 캐주얼 라인, 가죽소품 등의 비중을 늘려 나가고 있다. 독일의 명품 정장 브랜드 ‘휴고 보스’도 최근 들어 캐주얼하고 기능적인 정장 제품을 대거 선보이고 있다.

좀 더 개성 있게 입거나 편하게 착용할 수 있는 신사복에 대한 수요를 파고드는 움직임도 있다. 신세계백화점이 운영하는 프리미엄 맞춤셔츠 브랜드 ‘분더샵 카미치에’는 올해 상반기 매출이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4.5% 신장했다. 맞춤 시뮬레이션 서비스를 통해 고객의 몸에 딱 맞는 셔츠를 제공하는 것이 이 브랜드의 강점이다.

삼성물산 패션부문이 전개하는 ‘수트서플라이’는 7월 매출이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80% 신장했다. 기본 정장 제품 외에도 플리츠(주름) 바지, 드로스트링(졸라 매는 끈) 바지 등 다양한 제품을 선보여 소비자가 취향껏 고를 수 있도록 한 것이 이 브랜드의 특징이다.

삼성물산 패션부문 관계자는 “캐주얼 착용이 보편화되면서 정장의 인기가 줄어든 것은 사실이지만, 다양하고 개성 있는 슈트 스타일링에 대한 젊은 세대의 관심은 높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김은지 기자 eun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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