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억압하는 모든 것을 뜨겁게 끌어안고 뜯어내다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3월 29일 10시 2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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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출신 예술가 하이디 부허 회고전
아트선재 ‘공간은 피막, 피부’

‹신사들의 서재 스키닝›, 1978, 싱글 채널 16mm 필름 (컬러), 음향, 43. 13’47’’, 촬영 인디고 부허,  사진 제공: 하이디 부허 에스테이트
‹신사들의 서재 스키닝›, 1978, 싱글 채널 16mm 필름 (컬러), 음향, 43. 13’47’’, 촬영 인디고 부허, 사진 제공: 하이디 부허 에스테이트

한 여자가 오래된 집의 벽을 덮은 껍질을 뜯어낸다. 고무 라텍스로 만들어진 껍질은 풀과 거즈를 바른 벽에 밀착되어 있었다. 잘 떨어지지 않는 껍질을 여자는 씨름하듯 안간힘을 쓰며 떼어낸다. 벽의 살갗이 떨어져 나가는 듯 삐걱대는 소리도 들린다. 그녀는 스위스 출신 예술가 하이디 부허(1926~1993)다.

아버지의 서재와 조상 대대로 살던 집, 감옥과 병원의 ‘피부’를 만들고 뜯어낸 그녀의 작품들이 한국을 찾았다. 부허의 작품과 영상 기록 등 130여 점을 선보이는 아시아 첫 회고전 ‘하이디 부허: 공간은 피막, 피부’가 28일 서울 종로구 아트선재센터에서 개막했다.

● 억압하는 공간의 껍질들
‹바닥 피부(선대의 집, 오베르뮐) 파르케트 플로어링, 룸 12, 1층›, 1980, 황마, 부레풀, 라텍스, 340x260cm, 사진 제공: 하이디 부허 에스테이트 및 리만머핀, 뉴욕, 홍콩, 서울, 런던.

부허는 1970~80년대 공간에 풀을 바른 뒤 라텍스를 덮어 ‘피부’를 만든 다음, 그것을 떼어내는 스키닝(skinning) 연작을 했다. 초기에 선택한 공간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서재. ‘신사들의 서재 스키닝’(1978)은 서재 바닥의 껍질을 뜯어낸 뒤 46개 조각으로 자른 작품이다.

27일 부허의 아들 인디고는 하이디가 “마룻바닥 껍질을 조각낸 다음 그것을 어딘가로 보내는 듯 여행 가방에 담았다”고 설명했다. 부허는 이 가방을 ‘하이디 아발로네(전복)’라고 이름 붙였는데, 묵은 기억을 전복 껍질처럼 단단한 곳에 가둔다는 의미로 보인다.

‹잠자리의 욕망(의상)을 입은 하이디 부허 취리히›, 1976 사진 토마스 발라, 사진 제공: 하이디 부허 에스테이트


부허는 1970년대 초 남편 칼 부허와 이혼하고 스위스로 돌아온 뒤 자신만의 작업을 시작했다. 그 후 부모님의 오래된 집에서 껍질을 만들고 떼어내며 누구의 딸이나 아내가 아닌 온전한 자신으로 거듭나고자 했다. 이 과정을 2021년 독일 뮌헨 하우스데어쿤스트 전시는 ‘탈바꿈’(metamorphosis)이라는 키워드로 풀어냈다. 애벌레가 번데기를 거쳐 성충이 되는 과정을 의미한다.

그녀의 작업은 개인적 공간을 넘어 감옥, 정신병원 등으로 확장됐고, 이는 개인의 사회적 억압에 대한 탐구로 이어졌다. 전시장에서는 아버지의 서재, 선조들의 집, 벨뷰 요양원에서 떼어낸 껍질 조각들과, 이곳에서 라텍스를 뜯어내는 부허의 모습을 담은 영상을 볼 수 있다.

● 뜨겁게 끌어안고 떼어내다
27일 서울 종로구 아트선재센터를 찾은 하이디 부허의 두 아들 인디고 부허(왼쪽)와 메이요 부허. 사진: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부허의 스키닝 연작은 단순한 억압에 대한 저항으로는 읽히지 않는다. 만약 저항이었다면 개인을 억압했던 공간을 파괴하겠지만, 그녀는 대신 공간의 표면을 피부로 덮은 다음 거기에 묻은 모든 것을 떼어낸다. 마치 버려야할 것들을 마지막으로 힘차게 끌어안는 듯이 말이다.

인디고는 자신의 어머니가 스키닝 작업을 해야 했던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내면의 변화를 원했던 사람이고, 이를 위해서는 아버지, 남편은 물론 사회의 억압적인 다양한 면면에서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었습니다.”

‹빈스방거 박사의 진찰실›, ‹작은 유리 입구›, 전시 전경, 2023, 아트선재센터, 사진: CJY ART STUDIO

헨릭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에서 노라가 온전한 자신이 되기 위해 집을 박차고 나왔다면, 부허는 그 집에 남은 먼지 한 톨까지 피부에 붙인 다음 그것을 매달아 버린다. 마치 뱀이 벗고 나간 허물처럼. 전시장 속 작품들은 그렇게 그녀가 끊임없이 버리고 성장하려 노력했던 흔적들이다.

부허는 최근 제대로 조명 받지 못한 여성 예술가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며 활발히 재조명되고 있다. 2004년 스위스 취리히 미그로스현대미술관 회고전을 시작으로 2013년 파리 스위스 문화원, 2021년 독일 뮌헨 헤우스데어쿤스트 대규모 회고전 등이 있었다. 전시는 6월 25일까지. 5000~1만 원.

‹안나 만하이머와 타겟›, 1975, 텍스타일, 라텍스, 종이, 자개 안료, 213x200x3cm, 사진 제공: 하이디 부허 에스테이트.


김민기자 kim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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