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범죄 피해자 향한 편견에 균열을 내고 싶었다”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3월 28일 11시 3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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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피해자’ 펴낸 김재련 변호사

“오늘 법정에서 마음속에 웅크리고 있는 12살 소녀와 헤어지고 오시길 바랍니다.”

김재련 법무법인 온세상 대표변호사(51)가 2021년 11월 성폭력 사건 고등법원 판결 선고를 앞둔 피해자 A 씨에게 이렇게 말했다. A 씨는 12세 때 사촌에게 성폭행 피해를 입었지만 10년 넘게 이 사실을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다. “너희 부모님이 죽을 것”이라는 말이 두려워서였다. 그런 A 씨가 김 변호사를 찾아와 “이제는 그날의 기억으로부터 자유롭고 싶다”며 고소장을 제출했다. 지난한 법정 싸움을 앞둔 A 씨에게 김 변호사는 “그날의 소녀가 법정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게 오늘의 당신이 도와야 한다”는 말을 건넸다. 4년간 이어진 법정싸움 끝에 유죄 판결이 내려지던 날, A 씨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김 변호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젠 덜 힘들게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서울 서초구 법무법인 온세상 사무실에서 27일 만난 김재련 변호사가 자신의 신간 ‘완벽한 피해자’(천년의 상상)을 소개하고 있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폭력 사건’을 비롯해 20년 넘게 여성·아동·청소년 대상 성범죄 피해자를 대리해온 변호해온 김 변호사가 에세이 ‘완벽한 피해자’(천년의상상)를 16일 펴냈다. 서울 서초구 법무법인 온세상 사무실에서 27일 만난 그는 “세상이 요구하는 ‘피해자다움’을 완전하게 갖춘 피해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책 제목을 ‘완벽한 피해자’로 정했다”며 “성범죄 피해자를 향한 지독한 편견에 균열을 내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2012년 친부에게 10년 넘게 성폭행을 당해온 B 씨를 대리하면서 이 같은 질문들을 맞닥뜨렸다. ‘진짜 성폭행을 당했다면 왜 그때 신고하지 않았는지, 성폭행 피해를 입고도 왜 친부에게 ‘보고 싶다’는 문자를 보냈는지, 어떻게 멀쩡하게 대학과 직장을 다니고 있는지….’ 친부는 “합의에 의한 성관계”라고 주장했다. B 씨는 가족 중 한 명의 부탁으로 결국 법원에 처벌불원서를 제출했다.

김 변호사는 “이 사건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피해자가 자신을 성적으로 착취하는 아버지에게 순응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상황을 피해자의 관점에서 들여다봐야 한다. 어린 시절부터 친부의 가정폭력에 노출된 피해자는 가족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실제 법원은 친부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며 이렇게 판시했다. “피해자는 어린 시절부터 지속적으로 이뤄진 폭언과 폭력, 성폭력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심리적인 항거 불능 상태에 있었다고 봄이 상당하다.”

“재판부는 판결문으로서 수년 동안 자신을 탓해온 피해자에게 ‘이젠 자기 스스로를 탓하지 말라’는 말을 건네준 겁니다. 이런 판결문을 받아들 때 대리인으로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어요. 피해자가 자기 마음속에 웅크리고 있는 어린 피해자와 헤어질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니까요.”



하지만 그는 “피해자들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때론 재판 결과보다 과정이 더 중요하다”고도 강조했다. 2011년 50세가 넘은 한 여성이 그를 찾아와 10대 때 삼촌에게 입은 성폭력 피해를 털어놓은 적이 있다. 공소시효가 한참이나 지난 뒤였다. 정신적 피해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진행했지만 소멸시효가 완료되었다는 이유로 1심과 항소심에서 모두 패소했다. 그런데도 피해자는 “내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이었는지를 법정에서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만으로도 저는 이 재판에서 이겼다고 생각한다”며 항소심 법정에서 재판부를 향해 감사 인사를 전했다고 한다. 피해자에게 “마지막으로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셔도 좋다”는 판사의 한 마디가 피해자의 상처를 보듬은 것이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업무상 피해자를 마주해야 할 판사, 검사, 변호사, 수사관들에게 전하고 싶은 한 가지가 있다”며 “피해자에게 일상을 살아갈 용기를 주는 건 어쩌면 판결 결과보다는 재판을 진행하는 과정에 피해자에게 건네는 말 한 마디”라고 했다.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하셨다’ 는 말 한마디…. 존엄을 지키기 위해 법정에 선 피해자를 향한 그런 공감이 피해자가 일상으로 돌아가는 힘이 됩니다.”라고 당부했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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