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깐부’ 오영수에게 받은 것은…[이진구 기자의 대화, 그 후- ‘못 다한 이야기’]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10월 23일 11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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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징어게임 오일남 역 오영수 씨

사진=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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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영수 선생님과의 인터뷰는 이달 중순 선생님 자택 앞 공원 벤치에서 진행됐습니다. 볕이 따뜻한, 날이 아주 좋은 오후였지요. 오징어게임이 개봉한지 얼추 한 달 가까이 되던 시점이었습니다. 뵙자마자 가장 궁금한 것부터 여쭤봤습니다. 전 세계가 오징어게임에 빠졌는데 어떻게 그동안 인터뷰 기사가 없는지 이해가 안 갔거든요. 언론사의 인터뷰 요청이 없을 리가 없을 텐데 말입니다. 알고 보니 홍보 쪽에서 개봉 한 달 정도까지는 인터뷰를 자제해달라고 요청했다더군요. 인터뷰를 하다보면 아무래도 작품 내용이 언급될 수밖에 없고, ‘오일남’이 어떤 인물인지 알려지면 재미가 반감될 수밖에 없으니까요. 다른 배우들의 인터뷰가 거의 없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라고 합니다. 저는 어떻게 할 수 있었냐고요? 재수가 좋았지요. 인터뷰 날이 개봉한 지 얼추 한 달 가까이 된데다, 기사가 나가는 날도 한 달이 지난 이달 18일이어서 괜찮았다고 합니다. 오징어게임은 지난달 17일 공개됐습니다.

사진=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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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이 모 치킨 광고를 거절한 것은 널리 알려진 일입니다. 오징어게임의 주제를 함축한 ‘깐부’란 말의 의미가 훼손되면 안 되기 때문이라고 하셨죠. 그런데 선생님의 작품에 대한 애정은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부끄러운 일입니다만 인터뷰 사진촬영을 위해 저는 마른 오징어와 소주 한 병, 라면을 소품으로 준비해갔습니다. 첫 번째 게임(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후 게임이 무산된 뒤에 편의점 앞에서 일남과 기훈이 생라면 안주에 소주를 마시는 장면처럼 사진을 찍고 싶었기 때문이지요. 서로 소주 한잔 기울이며 안주로 오징어 다리를 들고 있는 모습을 찍으면 작품 제목과도 어우러져 괜찮은 사진이 될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께 부탁을 드렸는데 완곡하게 “조금 진지하게 했으면 싶은데…”라고 하시더군요.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나중에 치킨 광고 거절 이유를 듣고 나니 이해가 갔습니다. 선생님이 직접적으로 말씀하신 건 아니지만 자신의 모습이 다소 희화화되는 것이 작품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하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개봉 이후에도 작품의 이미지를 위해 일거수일투족을 조심한다고 할까요.

사진=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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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을 다하는 모습은 팬들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잘 드러났습니다. 인터뷰가 끝날 때 쯤 주변을 보니 산책 중인 주민들이 선생님을 알아보고 사인을 받기 위해 줄을 서있더군요. 10여 명 쯤 됐는데, 선생님은 모든 사인에 緣(인연 연)자를 써주셨습니다. 이렇게 만난 것이 다 인연이기 때문이라고 하시더군요.

인터뷰 기사의 반응은 뜨거웠습니다. 작품을 위해 거액의 광고를 거절한 것을 칭찬하신분도 계셨고, 조금이라도 더 갖기 위해 아옹다옹하는 세상에서 뭔가 더 숭고한 가치를 지향하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는 분도 계셨습니다. 참된 어른을 만난 것 같다고 하신 분도 계셨고, 연기력을 칭찬한 분도 계셨지요. 선생님은 그동안 살아오면서 많은 것을 받았기 때문에 앞으로는 당신도 남들에게 주면서 살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우리 모두가 선생님께 이미 아주 큰 것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서있는 자리에서 편법과 술수를 쓰지 않고, 묵묵히 성실하게 한 길을 걷는 것은 결코 바보짓이 아니라는 믿음이지요.

주위를 돌아보면 온통 어지럽고, 암울한 모습뿐입니다. 부당한 방법으로 하루아침에 수천억원을 꿀꺽하고도, 고작 6년 일하고 퇴직금으로 50억원을 받고도 정당한 노력의 대가라고 우기지요. 자기 자식 의사 만들기 위해 대학 교수라는 부모가 허위 경력에 표창장까지 위조해주고도 부끄러운 줄 모릅니다. 모 국 사태가 한창일 때 아주 유명한 한 대학교수분이 제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자녀들끼리의 논문 품앗이는 대학 교수 사회에서는 얘깃거리도 안 될 정도로 만연된 현상이라고.

선생님도 사람인데 성공과 인기, 돈을 싫어할 리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에게 인기와 부는 연기를 하는 이유가 아니라 그 길을 다 걷고 난 뒤에 따라오면 좋고 아니면 할 수 없는 것 정도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걸 못 견디지요. 노력한 만큼 얻지 못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면 시작을 안 합니다. 노력한 만큼 얻는 것은 당연하고, 그 이상 얻어야 정당한 노력의 대가를 받았다고 여기지요. 적은 노력으로 큰 성과를 얻는 게 잘하는 것이라는 그릇된 믿음. 최근 뉴스를 도배하는 대장동 사태, 모 국 교수 부부의 파렴치한 행동 등이 다 이런 생각에서 비롯된 것 아니겠습니까.

사진=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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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사람들이 배우 오영수에게 감동을 받은 것은 단순히 대박 난 작품에 출연해서도, 연기력이 탁월해서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도 있을 것입니다만 더 큰 것은, 우리가 믿고 싶지만, 나만 손해볼까봐 꺼려했던 어떤 삶에 대한 자세가 사실은 맞는 것이고, 충분히 걸을 만한 길이라는 걸 보여줬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믿음은 자신이 있다는 것을 아주 드물게, 간간히만 알려주지만… 그때마다 우리에게 그래도 아직 세상은 살만하다는 위안과 살아갈 힘을 주지요. 누군가에게 그런 위안을 줄 수 있는 삶이 많아진다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깐부 천지인 세상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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