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군 버스 탔던 ‘오월 막내’ 이름 찾아주고 싶다”

이형주 기자 , 이형주 기자 입력 2021-05-16 13:31수정 2021-05-16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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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에 사라진 사람들’ <3> 5·18민주화운동 41주년을 이틀 앞둔 16일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는 굵은 빗줄기로 흠뻑 젖었다. 묘지에는 우산을 받쳐 든 추모객들의 발길이 하루 종일 이어졌다. 5·18민주화운동 희생자 901명이 잠들어있는 묘지 한쪽에는 ‘잊혀진 사람들’이 있다. 1묘역 4구역에 있는 5기의 ‘무명열사의 묘’다. 5·18 당시 숨졌으나 신원이 확인되지 않아 가족을 찾지 못한 이들이다. 4구역 97번은 5·18 희생자 가운데 가장 어린 남자아이의 묘다. 당시 검시 자료는 이 아이를 4살로 추정했다. 김영훈 5·18민주유공자유족회장은 “41년이 흘렸지만 오월의 막내인 4살 아이 등 희생자가 가족 품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 5·18민주묘지에 묻힌 ‘오월 막내’

1980년 광주시 사회복지과에 근무했던 조성갑 씨(81)는 5월 26일부터 6월 중순까지 유족들이 전남도청 앞 상무관에 안치된 시신 69구의 신원을 확인하는 것을 돕고 광주에 흩어져 있던 희생자 50명의 시신을 수습했다.

조 씨는 6월 7일 오전 광주 남구 효덕동 주민들에게 “30대 여성이 지프차를 타고 와 남자아이 시신을 야산에 묻고 갔다”는 제보를 들었다. 곧바로 효덕동 민둥산으로 가 남자아이 시신을 수습했다.

조 씨는 같은 날 오전 11시 조선대병원으로 아이의 시신을 옮겼고 의사가 사인을 밝히는 검시를 했다. 숨진 아이는 4살 정도이며 사인은 총상으로 인한 과다출혈, 사망 날짜는 5월 23~28일로 추정됐다. 광주의 한 5·18연구가는 “이 아이의 검시 서류는 10개가 있는데 1개 서류에 ‘5월 27일 사망 추정’이라고 적혀 있다”며 “27일 숨진 것이 유력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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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이는 이후 광주 북구 망월동 시립묘역 113번에 안장됐다. 2002년 국립5·18민주묘지로 이장되면서 신원을 밝히기 위해 유전자를 채취했다. 전남대 의대에서 채취한 행방불명자 가족 366명과 유전자 대조 작업을 했으나 일치하는 가족은 없었다.


● “오월 막내 이름 찾아주고 싶다”

41년이 흘렀지만 이 아이에게 이름과 가족을 찾아주려는 노력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5월 진실 규명을 위한 또 하나의 퍼즐이기 때문이다. 이 아이는 1980년 5월 27일 시민군들이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전남도청에서 계엄군 버스를 함께 탔던 남자아이일 가능성이 제기됐다. 미국 기자인 노먼 소프는 최근 한 아이가 계엄군 버스를 타고 이송되는 장면을 촬영한 사진을 공개했다. 이 아이는 당시 계엄군 버스를 탄 모습을 촬영한 방송사 영상에서도 확인됐다.

5·18 당시 계엄군에게 붙잡힌 염동유 씨(65)는 1990년 출판된 ‘광주 5월 민중항쟁사료전집’에 “27일 전남도청에서 5살 정도 되는 아이가 울고 있었는데 가슴이 아팠다. 아이니까 (계엄군도) 죽이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적었다. 염 씨는 “계엄군에게 시민군 15명이 사살된 뒤 (나는) 체포돼 땅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엎드린 상태에서 전남도청 민원실에서 남자아이가 울고 있는 걸 봤는데 살아있다면 만나고 싶다”고 증언했다.

이동춘 목포과학대 교수(62)는 “27일 전남도청에서 붙잡혀 도청 마당으로 끌려갔는데 먼저 체포된 고교생 두 명이 4, 5살 정도 되는 남자아이를 맡겼다. 버스를 타고 상무대 영창으로 끌려가면서 헌병에게 아이를 인계했다”고 말했다. 그는 2002년 5·18을 왜곡하는 지만원 씨를 고소해 첫 형사 처벌을 받게 한 5·18 시민군이다.

이 교수는 “10여 년 전 5·18 당시 상무대에 근무하는 헌병이 ‘아이가 없어져 부대가 난리가 났다’고 말한 것을 들었다”며 “그 아이가 상무대에서 사고사를 당해 매장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는 최근 40대 회사원이 “당시 7살이었는데 전남도청 버스 사진 속이 아이가 자신인 것 같다”고 주장해 진위를 확인하고 있다.

조 씨는 이와 다른 가능성을 제기했다. 그는 “오월 막내 이야기가 많아 나와 기억을 더듬어봤는데 1980년 5월 20일경 광주역에서 시민군이 (계엄군에 의해) 숨진 어린아이 시신을 리어카에 싣고 가는 것을 봤다고 했다”면서 “리어카에 실려 간 아이와 효덕동 야산에서 수습한 아이가 같은 옷을 입었던 같다”며 사진 속 아이가 아닐 수 있다고 주장했다. 조 씨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기 위해서는 다른 목격자가 나와야 한다. 진상규명조사위원회는 행방불명자 가족 2명을 상대로 민주묘지에 묻혀 있는 아이와의 연관성을 확인하는 2차 유전자 검사를 하기로 했다.

●행불자 찾으려면 군인 증언 절실

진상규명조사위원회는 올 2월 5·18 당시 광주에 투입됐던 11공수여단 군인 3명의 증언을 들었다. 이들은 “5월 24일 광주 남구 송암동에서 육군보병학교 병사들과 오인사격을 벌인 직후 시민군을 찾기 위해 수색을 하다 보리밭에 사격을 했다. 이후 살펴보니 보리밭에 어린애가 숨져 있어 매장했다”고 진술했다.

진상규명조사위원회는 군인들이 매장을 한 아이가 오월 막내일 가능성을 확인하고 있다. 효덕동 야산에서 수습한 아이의 검시서류를 쓴 경찰이 “30대 여자가 매장을 했고 옷에 노잣돈 1000원을 넣었다”고 적었다는 점을 확인하고 해당 경찰을 찾아 당시 상황을 청취하기로 했다. 진상규명조사위원회는 또 오월 막내 외에 또 다른 아동 희생자가 있었는지도 살펴보고 있다.

진상규명조사위원회와 5·18기념재단 등은 당시 행불자들의 암매장 장소를 찾기 위해 제보를 받고 있다. 차종수 5·18기념재단 고백과 증언센터 팀장은 “신군부가 5월 진실을 은폐 축소하면서 진상 규명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며 ”그날의 진상이 밝혀지도록 당시 광주에 투입됐던 군인들의 양심적 증언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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