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부로 나대지도, 깝치지도 마라[손진호의 지금 우리말글]

손진호 어문기자 입력 2021-05-16 10:00수정 2021-05-16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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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박인환은 tvN ‘나빌레라’의 동영상에 달리는 댓글을 확인하는 재미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 발레라는 꿈을 꾸는 ‘덕출’ 연기로 젊은 팬들까지 사로잡고 있는 그는 욕심이 나는 캐릭터를 묻는 질문에 “앞으로 얼마나 더 연기를 할 수 있겠느냐”면서도 “주어지는 역할은 뭐든지 열심히 해내고 싶다”며 환히 웃었다. 주현희 스포츠동아 기자 teth1147@donga.com

“나보고 귀엽대. 하도 까불어서 그런가.”

드라마 ‘나빌레라’에서 ‘발레 할배’ 열풍을 몰고 온 배우 박인환. 여든이 가까운 나이에 발레복이 흠뻑 젖도록 연습했다는 그의 인터뷰엔 치열함은 온데간데없다. 사람 냄새만이 유쾌하게 묻어난다.

‘까불다.’ 가볍고 조심성 없이 함부로 행동하는 모습을 뜻한다. 이 말의 어원은 ‘키’에서 찾을 수 있다. 나이 드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어릴 적 오줌싸개에게 소금을 얻으러 다니게 할 때 머리에 들씌웠던 것 말이다. 본래는 곡식의 잡티를 골라내는 도구였다. 키를 위아래로 흔들어 곡식의 티 따위를 날려 버리는 것을 ‘까분다’라고 한다. 나이가 어린 아이가 큰 아이에게 바람에 날리는 곡식 껍질처럼 가볍게 구는 건 그야말로 ‘까부는’ 행동이다. “까불지 마” “까불고 있어!”엔 “어린 녀석이 왜 그러느냐?” 혹은 “네 행동이 지나치다”는 뜻이 담겨 있다.

때론 재미있고, 장난기 가득한 ‘까불다’란 낱말도 요즘 들어 ‘나대다’와 ‘깝치다’에 밀리고 있다. 특히 ‘깝신거리고 나다니다’는 뜻의 ‘나대다’의 기세가 엄청나다. 이 말, 윤흥길의 소설 ‘완장’에 나오는 주인공 종수를 떠올리게 한다. ‘하빠리’(표준어는 ‘하바리’다) 완장질을 하며 나대다 결국 완장을 뺏기고 동네를 떠나야 하는 신세가 된 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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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중의 말 씀씀이도 이와 닮았다. 주제도 모르고 설치는 사람에게 “누굴 믿고 나대냐”고 힐난하는가 하면, “진짜 나대기만 해. 그땐 너 죽고 나 죽는 거야”란 살벌한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한다. 재미있는 건, “미쳤나 봐. 심장아 나대지 마” “심장이 나대잖아요” 등 남녀 간 사랑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면서도 ‘나댄다’고 한다.

발음이 거센 ‘깝치다’도 젊은이들 사이에서 세를 넓히고 있다. 까불다는 물론이고 ‘으스대다’ ‘잘난 척하다’는 뜻으로 쓰인다. “누구 앞에서 깝쳐?”란 표현에선 ‘기어오르다’란 말맛도 풍긴다.

사실 ‘깝치다’란 말은 오래전에 쓰였다. 이상화의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 나온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암울했던 일제강점기(1926년) ‘개벽’ 잡지에 실린 시의 한 구절이다. 한데 이상하지 않은가. 사전대로라면 나비 제비야 ‘까불지(깝죽대지) 마라’란 얘긴데, 의미를 종잡을 수 없다.

그도 그럴 수밖에. 이 시에 나오는 ‘깝치지 마라’는 ‘재촉하지 마라’ 혹은 ‘서두르지 마라’란 뜻의 경상도 사투리다. 사투리이기 때문에 방치되고, 그 결과 사라져가던 중이었다. 그러다 요즘 들어 쓰임새가 전혀 다른 낱말로 생명력을 얻으려 하는 것이다.


더는 깝치다를 ‘깝죽거리다’의 잘못이라고만 고집하지 말고 ‘재촉하다’, ‘서두르다’의 뜻을 더해야 한다. 깝치다가 지금처럼 비속어로서 기능할지, 아니면 ‘재촉하다’의 쓰임새를 인정받아 우리말의 곳간을 채울지는 언중의 몫이다.

그나저나 내 편은 무얼 해도 감싸주며 나대는 꼴은 정말이지 보고 싶지 않다. 누구라도 잘못할 땐 한 드라마의 대사처럼 ‘아닌 건 아닌 겨!’라고 해야 옳다.

손진호 어문기자 songba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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