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설강화’로 586 운동권 ‘뒤집어 보기’ 가능할까

  • 주간동아
  • 입력 2021년 4월 18일 11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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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접견, 간첩 접촉…현실 속 운동권 ‘역린’

하반기 방영 예정인 JTBC 드라마 ‘설강화’. JTBC 제공
하반기 방영 예정인 JTBC 드라마 ‘설강화’. JTBC 제공
586(50대·1980년대 학번·1960년대생)은 항상 정의의 편에 섰는가. 민초를 위해 헌신하는 명문대 출신 ‘상남자’였는가. 문재인 대통령이 관람한 영화 ‘1987’ 속 586세대는 시대 주역이다. 또 다른 영화 ‘오래된 정원’, 지난해 방영한 드라마 ‘화양연화’ 속 586세대 주인공도 멋진 모습으로 그려졌다. 다만 현실 속 운동권의 모습은 꼭 그렇지만은 않은 듯하다. 퍼뜩 떠오르는 얼굴은 자녀 입시비리 의혹에 휩싸인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다. 젊은 시절 활발하게 학생운동을 한 허인회 씨는 태양광 관련 비리,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는 성폭력으로 영어의 몸이 됐다.

운동권 출신 받아들인 안기부
엄혹했다는 1980년대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이하 안기부)는 운동권 출신을 일부러 입부시켰다. 개인이 아닌 나라와 민족 같은 공동체 문제를 치열하게 고민하고, 난제를 혁파하는 혁명아적 기질을 가졌다고 평가했다. 이렇게 안기부에 들어간 운동권 출신은 남녀·빈부·좌우 등 배경도 다양했다. 일반 대학을 다녔기에 획일적으로 군사학 등을 익히는 사관학교 출신과는 문제 해결 방식이 달랐다.

춘분 전 꽃을 피우기에 ‘희망’ ‘위안’이라는 꽃말을 가진 수선화과 화초에 설강화(雪降花· snowdrop)가 있다. 서울 양재동 꽃시장 등에 가면 구할 수 있다. JTBC 드라마 ‘설강화’가 방영 전부터 화제와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1987년 피투성이가 된 채 여대생 기숙사로 뛰어든 북한 간첩을 운동권 학생으로 오인해 보호하다 연정을 품게 된 여학생, 간첩을 추적하다 그 여학생을 좋아하게 된 깐깐한 안기부 수사관의 삼각관계가 소재다.

‘586=정의의 사나이’가 아닌 ‘안기부 수사관=상남자’라는 캐릭터는 특이하다. 최민수·고현정·박상원을 내세워 공전의 히트를 친 SBS 드라마 ‘모래시계’(1995)에서는 “정권의 하수인이 되려 하느냐”는 운동권의 조롱에 굴하지 않고 검사가 돼 정의를 지킨 강우석 검사(박상원 분)가 주목받았다. 특전사 707 요원을 소재로 한 드라마 ‘태양의 후예’가 어깨 처진 대한민국 장교의 인기를 올려줬듯, ‘설강화’는 문재인 정부 들어 천덕꾸러기가 된 국가정보원의 기를 살려줄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제작이 완료되지도 않은 이 드라마를 놓고 ‘사투’(사상투쟁)에 가까운 논전이 벌어졌다. 4·7 재보궐선거를 앞두고 나온 반대 목소리는 여당 참패 후 더욱 커졌다. JTBC 측이 ‘설강화’ 시놉시스를 공개한 직후인 3월 26일 청와대 국민청원 사이트에 ‘JTBC의 드라마 설○○의 촬영을 중지시켜야 합니다’라는 제목의 청원이 올라온 것이 시작이었다. 4월 11일에는 누적 동의자 수가 20만 명을 넘어섰다.

이 청원은 “민주화운동에 북한의 개입이 없었다는 걸 몇 번씩이나 증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저 작품은 간첩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드라마를 협찬하는 한 업체는 협찬을 철회하기도 했다. 청원을 응원한 것은 친문(친문재인) 성향의 인터넷 커뮤니티였다. 청와대 청원 글을 링크한 ‘클리앙’ 게시글에는 드라마 제작을 비판하는 댓글이 1만 개 이상 달렸다. 인터넷 카페 ‘여성시대’에선 “JTBC 앞에서 ‘설강화’ 방영 중지를 촉구하는 트럭 시위를 하겠다”며 모금까지 벌어졌다.

드라마 방영 반대자들은 ‘설강화’의 여주인공 이름이 ‘영초’인 것도 문제 삼았다. 고려대 재학 시절 학생운동을 했고 ‘시사저널’ ‘오마이뉴스’ 편집장을 지낸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은 2017년 ‘영초언니’라는 책을 냈다. 1970년대 고려대에서 민주화운동을 하다 긴급조치 위반으로 조사받은 천영초 씨의 일대기를 다룬 내용이다. 여주인공 이름을 서 이사장 책에서 따온 것 아니냐는 비판이다. 이에 JTBC 측은 바로 여주인공의 이름을 바꾸겠다고 밝혔다.

박정희도 포섭하려 한 대남 공작
1995년 체포된 ‘부여 간첩’ 김동식 씨(왼쪽). 동아일보DB
1995년 체포된 ‘부여 간첩’ 김동식 씨(왼쪽). 동아일보DB
북한의 대남 공작은 대담하고 역사도 길다. 대한민국 최고 권력자도 포섭하려 시도했다. 대일항쟁기 만주군 중위였던 박정희 전 대통령은 해방 후 한국에 돌아와 육군 장교가 됐다. 대구10·1사건(1946)으로 사망한 셋째 형 박상희 씨의 영향으로 남로당에 가입해 영남총책으로 활동했다. 여수·순천사건(1948) 후 군에 침투한 남로당원을 추적하는 숙군 수사에 걸려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전향해 죽음을 면했다. 이후 육군본부 문관으로 있다 6·25전쟁 발발로 현역에 복귀해 사단장을 지낸 후 5·16군사정변(1961)을 일으켰다.

박 전 대통령의 형 박상희 씨의 사위가 김종필 씨다. 북한은 박상희 씨와 가까이 지낸 월북자 황태성을 보내 김종필을 접선케 했다. 황태성은 당당히 “친구의 동생인 박정희를 만나러 왔다”고 했기에 김종필은 그를 대접했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은 황태성을 만나주지 않았고, 오히려 김종필로 하여금 그를 체포하게 했다. 황태성은 처형됐다. 대한민국 최고 실력자를 포섭하려던 북한의 대담한 공작이 실패한 것이다.

남북은 비밀리에 무장 공작대를 보내 상대를 치는 치열한 대결을 벌이기도 했다. 6·25전쟁 후 상당 기간 북한은 한국에 가족이 있는 월북자들을 훈련시켜 간첩으로 보냈다. 가족, 친지를 포섭해 공산혁명을 위한 지하당을 구축하려 했다. 이들이 연로해져 활동할 수 없게 되자 서울과 말씨가 비슷한 황해도의 똑똑한 청소년들을 뽑아 김정일정치군사대에서 간첩으로 교육시켰다. 이들은 대한민국에 침투해 1980~1990년대 대학가를 주름잡은 주사파 세력과 접선했다. ‘부여 간첩’ 김동식 씨와 ‘울산 부부 간첩’ 최정남-강연정 씨가 대표적이다.

부여 간첩 김동식은 저서 ‘아무도 나를 신고하지 않았다’에서 자신이 만난 586세대를 열거했다. 당시 안기부는 ‘역용(逆用)공작’(적의 정보 요원을 포섭해 이중간첩으로 활용하는 것)을 하고 있었다. 이미 잡은 북한 공작원을 통해 또 다른 직파 간첩이 온 것을 파악하고 경찰 대공팀으로 하여금 그가 누구를 만나고 다니는지 추적하게 한 것이다. 역용한 북한 공작원을 통해 김동식을 부여로 유인한 뒤 잡으려다 실패했고, 군 병력까지 투입해 총격전을 벌인 끝에 김씨를 검거했다.

당시 김씨는 이인영, 우상호, 함운경, 허인회 씨 등 국내 운동권 7명과 접촉했다고 주장했다. 김씨 주장에 따르면 그는 7명에게 자신이 북한에서 왔다고 밝혔다. 김씨를 접촉한 이들 중 3명은 그를 안기부 프락치로 의심해 도리어 공안기관에 김씨를 신고했다. 나머지 4명은 침묵했다고 한다. 김씨가 훗날 ‘아무도 (간첩이라고 밝힌) 나를 신고하지 않았다’라는 책을 낸 이유다. 주사파 운동권은 북한과 접점이 있었다. 주사파의 대부로 불리는 ‘강철’ 김영환 씨는 실제 북한 공작원과 접선, 반(半)잠수정을 타고 북한에 가 김일성을 만나기도 했다.

‘뒤집기’ 통한 ‘역사 바로 보기’?
이런 사실이 있었기에 586세대는 북한과 연결됐다는 지적에 예민할 수 있으나, 드라마 ‘설강화’는 창작일 뿐이다. JTBC 측은 “‘설강화’는 민주화운동을 폄하하고 안기부와 간첩을 미화하는 드라마가 아니다” “‘남파 간첩이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다’ ‘안기부를 미화했다’는 지적은 제작 의도와 무관하다”고 밝혔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도 “드라마는 창작물이라 사실관계보다 표현의 자유를 보장해야 할 필요가 더 크다. JTBC 측에 공식적으로 드라마 내용 수정 등의 요구를 할 계획은 없다”고 밝혔다.

1980~1990년대 한국 경제가 무역 흑자를 거듭하며 건실하게 성장한 데는 ‘음지의 전사’ 안기부 요원들의 대공투쟁이 한몫했을 수도 있다. 북한 군관을 ‘상남자’로 묘사한 드라마 ‘사람의 불시착’이 남북 대화 조성에 기여했다면, ‘설강화’는 또 다른 무대를 만들 수 있다. 문화 창작을 놓고 갈등과 분열을 겪는 현실은 한국 사회가 선전·선동에 취약하다는 방증인지 모른다. 좌파는 민중예술을 통해 ‘역사 뒤집어 보기’를 시도했다. 우파도 그럴 수 있을 것인가. ‘역사 바로 보기’는 여러 창작물의 발표와 토론으로도 이뤄질 수 있다. 눈 속에서 피는 ‘설강화’가 그 신호탄이 될지 지켜볼 일이다.

[이 기사는 주간동아 1285호에 실렸습니다]

이정훈 기자 h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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