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은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가[유(윤종)튜브]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3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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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윤종 문화전문 기자
유윤종 문화전문 기자
“노래는 즐겁구나, 산 너머 길 나무들이 울창한 이 산에, 가고 갈수록 산새들이 즐거이 노래해….”

1970년대 애창곡 ‘노래는 즐겁다’다. 신선한 바람이 가슴으로 흘러들어오는 것 같다. 원곡은 ‘로렐라이’로 유명한 독일 작곡가 겸 민요 편곡자 질허가 1827년 작곡했다. 원곡 가사는 어떨까.

“나는 마을에서 떠나야만 하나? 사랑하는 그대가 있는데? … 그대 울지만, 나는 돌아오리다.”

음악학자 한슬리크는 글루크의 오페라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를 예로 들어 가사를 배제한 음악 자체는 감정을 표현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페데리코 체르벨리의 17세기 유화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 동아일보DB
음악학자 한슬리크는 글루크의 오페라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를 예로 들어 가사를 배제한 음악 자체는 감정을 표현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페데리코 체르벨리의 17세기 유화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 동아일보DB


같은 선율인데 느낌은 정반대다. 독일인들에게 한국어 번안 가사를 들려주면 놀란다. “원가사는 쓸쓸한데 당신들 가사는 너무 유쾌하네.” 과연 가사를 배제한 ‘음악’은 그 자체로 어떤 감정을 묘사하기에 부족한 도구일까.

1937년 11월, 소련을 대표하는 작곡가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5번이 레닌그라드(오늘날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초연되었다. 마지막 4악장은 트럼펫의 찬란한 음색이 불을 뿜는 강렬한 행진 리듬으로 끝난다. 관영 매체들은 이 부분이 공산주의의 빛나는 승리를 그리는 것으로 해석했다. 스탈린의 억압통치가 정점에 달한 시기였다.

훗날 쇼스타코비치는 지인 몇몇에게 은밀히 진실을 밝혔다. “(이 곡은) 누군가 몽둥이로 내리치면서 ‘너의 임무는 기뻐하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면 휘청거리면서 일어나 앞으로 행진하며 그 말을 중얼거려야 한다.” 이 일화는 음악이 전달하는 ‘감정’이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상반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렇다면 음악으로 감정을 표현한다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일까.

독일 음악학자 에두아르트 한슬리크(1825∼1904)의 생각은 그랬다. 그는 18세기 오페라 작곡가 글루크의 오페라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에 나오는 아리아 ‘에우리디체 없이 나는 어떻게 할까?’를 예로 들어 ‘음악이 감정을 표현한다는 생각은 쓸데없다’고 주장했다. 가사를 ‘에우리디체를 찾았으니 나는 기쁘다’로 바꿔 불러도 그럴듯하게 들린다는 것이다.

한슬리크는 같은 시대 작곡가 브람스를 찬양한 인물이었다. 당시는 음악을 넘어 문학과 미술이 어울린 종합예술을 만들어야 한다는 ‘바그너파’와 음악은 순수한 형식이 중요하다는 ‘브람스파’가 대립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한슬리크가 간과한 것이 있다. 모든 문화권에서 인간은 사랑과 기쁨과 절망을 노래에 담아 불렀고 나아가 사람의 목소리를 뺀 ‘기악’만으로도 희로애락을 표현했다. 한슬리크가 옹호한 브람스도 사랑의 슬픔과 인생의 허무를 노래한 가곡들을 작곡했다. 브람스가 작곡한 교향곡이나 실내악곡 등 순수 기악곡에서도 우리는 가을과, 사랑과, 허무의 상념들을 찾아낸다.

브람스에게 ‘음악은 감정을 표현할 수 없는가’라고 묻는다면 뭐라고 답할까. “음악도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 다만 그것이 말이나 글로 표현하는 감정과 다를 뿐이다. 글이 표현하는 감정과 음악이 표현하는 감정이 어울려 멋진 효과를 낳을 수도 있다.” 상상이지만 그렇게 말할 것 같다.

핀란드를 대표하는 작곡가 잔 시벨리우스는 1902년 교향곡 2번을 발표했다. 핀란드가 러시아 통치 아래 놓였던 시기였다. 격정에 찬 4악장 피날레를 들은 청중은 그가 3년 전 발표한 교향시 ‘핀란디아’처럼 작곡가가 이 곡에 애국적인 메시지를 담은 것으로 해석했다.

시벨리우스의 친구였던 지휘자 카야누스는 “암울한 2악장은 이 시대의 위협적인 불의에 대해 뼈저린 마음으로 항거함을 뜻한다. 4악장은 미래의 밝고 낙관적인 전망을 보여주는, 승리의 결론으로 발전한다”고 설명했다. 이 해석에 대해 시벨리우스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침묵을 유지했다. 작품의 의미를 한정된 시대에 갇히게 하지 않고 넓게 열어두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26일 통영국제음악당에서는 2021 통영국제음악제 개막공연으로 크리스티안 바스케스가 지휘하는 통영페스티벌오케스트라가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을 연주한다.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리는 올해 교향악축제에서는 4월 20일 홍석원 지휘 광주시립교향악단이 같은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을, 4월 4일에는 이종진 지휘 춘천시립교향악단이 시벨리우스 교향곡 2번을 연주한다. 두 작곡가가 의도적으로 선택한 ‘모호성’이 오히려 더 깊은 공감으로 다가올 수도 있을 것이다.

유윤종 문화전문 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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