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얼굴 대화, 정치 민낯[손진호의 지금 우리말글]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1월 22일 08시 2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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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동아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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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정취를 즐기려 산을 찾았다. 꽃비처럼 흩뿌려진 낙엽이 발밑에서 바스락댄다. 지는 낙엽은 가을바람을 원망하지 않는다지만 왠지 짠하다.

산 정상과 쉼터 등에서 많은 등산객들을 만났다. 숨이 차 그랬겠지만, 이들 중 일부는 마스크를 턱에 걸치거나 벗은 채 ‘맨얼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맨얼굴은 ‘화장 분장 따위로 꾸미지 않은 본래 그대로의 얼굴’이다. 한데 우리 사전엔 올라 있지 않다. 그러다 보니 ‘민낯’으로 고쳐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이도 있다. ‘민낯 대화’를 나눈다고? 어딘지 모르게 부자연스럽지 않은가.

‘민’은 ‘꾸미거나 딸린 것이 없는’, 맨은 ‘다른 것이 없는’의 뜻을 더하는 접두사다. 민소매, 민가락지에서 보듯 ‘민’은 무언가가 결여된 상태를 나타낸다. 반면 맨눈, 맨땅의 ‘맨’은 ‘무엇을 더하지 않은 그대로’라는 말맛을 풍긴다. 한때 신세대들이 즐겨 썼던 ‘생얼’ ‘쌩얼’은 세력을 잃어가지만 맨얼굴은 ‘화장기 없는 맨얼굴’ 등으로 자주 오르내린다. 그러니까 맨얼굴은 표준어로 자리매김하려 민낯, 민얼굴과 경쟁 중이다.

민낯 역시 언어 세계에서 의미를 확장하는 중이다. ‘화장을 하지 않은 얼굴’이라는 뜻을 넘어, 어떤 사람이나 조직의 모습을 비유적으로 이를 때 쓰인다. ‘정치(인)의 민낯’, ‘주택시장의 민낯’ 등.

그러고 보니 얼굴을 가리키는 낱말이 많다. 신관, 낯, 낯짝, 광대, 쪽이 있다. 신관과 낯이 얼굴을 점잖게 가리킨다면 낯짝과 광대는 속되게 이르는 말이다. 이 중 ‘쪽팔린다’고 할 때의 쪽이 가장 속된 표현 같다. 광대등걸은 파리해져서 뼈만 남은 얼굴을 뜻한다.

흔히 안색(顔色)이라고 하는 ‘낯빛’도 재미있다. 이어령 선생은 낯빛은 감추고 숨기려 해도 어쩔 수 없이 배어 나오는 ‘내면의 표정’이라고 했다. 안색보다 훨씬 내면적이고 정신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요즘 언중은 안색을 기분보다는 ‘(안색이) 좋다, 창백하다’ 등 건강 상태를 말할 때 주로 쓴다.

이 같은 표현을 담은 한자말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홍안(紅顔)은 젊어서 혈색이 좋은 얼굴을, 창안(蒼顔)은 창백한 얼굴을, 추안(秋顔)은 늙은 얼굴을 이른다.

안색이 일곱 가지, 여덟 가지 빛으로 변할 만큼 매우 질색하는 것을 ‘칠색 팔색(을) 하다’라고 한다. 빨강·주황·노랑·초록·파랑·남빛·보라의 일곱 빛깔을 가리키는 ‘칠색(七色)’에 사전엔 없지만 여덟 빛깔을 이르는 ‘팔색’이 더해진 것이다. 허나 언중의 말 씀씀이는 이와 다르다. 많은 이가 ‘질색팔색’이라고 한다. ‘몹시 싫어하거나 꺼리는 뜻’의 질색에 팔색이 붙은 낱말이다. 이때 ‘팔색’은 운율을 맞추기 위해 사용된 것으로 별다른 뜻이 없다. 표준국어대사전은 관용구로 ‘칠색 팔색(을) 하다’를 올려 놓았지만 고려대 한국어대사전은 현실 언어를 반영해 ‘질색팔색’을 표제어로 삼았다.

가을이 어느새 야위어간다.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이 있다면, 반가운 낯빛으로 반기시길. 그나저나 우리 정치도 국민들의 낯빛을 살펴 속마음을 제대로 헤아려주었으면 좋으련만.

songba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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