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잼 도시 대전? 소제동 골목길엔 남다른 재미가…[전승훈 기자의 디자인&콜라보]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0월 24일 18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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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트벨트’로 탈바꿈한 옛 철도관사, 대전 소제동

몸이 불편해 밖에 나가지 못하는 할머니를 위해 할아버지가 마당에 하나 둘 심었던 대나무가 방치된지 수십년 만에 울창한 숲이 되었다. 대나무로 유명한 전남 담양이 아니라 대전 시내 중심가인 소제동 골목길에서 만나는 뜻밖의 풍경이었다. 시원스럽게 길쭉길쭉 뻗은 대나무 숲 사이에는 사진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젊은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마당 끝에 있는 한옥 건물인 ‘풍뉴가’에서는 브랜딩 차를 판다.


오래된 집 마당에는 집과 함께 늙어가는 나무가 한 두그루씩 있게 마련. 소제동 골목길 의 집들에도 철도관사 마을의 역사를 보여주는 나무들이 있다. 그 중 한 곳이 ‘두충나무집’이다. 두충나무는 뼈와 혈관 건강에 좋다고 소문이 난 한약재. 주인장이 약으로 달여 먹기 위해 나무껍질을 벗겨낸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집 안에 들어가보니 흑백사진을 찍을 수 있는 사진관이 있고, 오후 햇살을 받으며 마루에 앉아 느긋하게 볼 수 있는 만화도 있다.

대전역 주변에 있는 한국철도공사(코레일) 본사인 최첨단 쌍둥이 빌딩 뒤편에 시간이 멈춘 듯한 동네. 대전에서 가장 오래된 동네인 소제동의 100년 골목길이 긴 잠에서 깨어나고 있다. 음식점과 카페, 문화예술이 접목되며 젊은층과 장년층 모두가 찾는 뉴트로(New+Retro) 공간으로 급부상 중이다.

● ‘대전 블루스’…근대 철도도시 대전

대전을 상징하는 노래는 ‘대전 블루스’다. 여수는 밤바다, 부산은 갈매기가 주인공이지만, 대전 사람들의 감정이 이입되는 대상은 열차다. “잘 있거라~나는 간다”고 외치며 이별의 말도 없이 떠나가는 ‘대전발 0시50분’ 밤 기차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경부선과 호남선이 교차하는 대전은 철도와 함께 성장한 근대도시다. 1895년(고종32) 지방관계 개혁 때 ‘회덕군 산내면 대전리’로 승격된 대전은 당시 ‘거주자가 수십 호에 지나지 않고, 갈대가 무성하고 황량한 한촌’이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런데 1905년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대전이 도시로 새롭게 태어났다. 원래 경부선이 공주를 경유하려 했으나, 계룡산을 뚫어선 안된다는 유림들의 반대로 무산되면서 ‘한밭 마을’이었던 대전이 근대철도 도시로 급속히 성장하게 된 것이다. 1914년 호남선 대전역까지 개통되면서 대전은 사통팔달의 요지로 탈바꿈했다.

소제동은 약 100년 전 근대도시 대전이 태동할 당시 철도부설을 위한 일본인들이 짓고 살던 관사에서 시작됐다. 1910년 대전역 주변에 남관사촌과 북관사촌, 1920년대 소제동 동관사촌이 생성됐다. 남관사촌과 북관사촌은 한국전쟁으로 파괴돼 거의 흔적이 없다. 동관사촌은 해방이후 서민들의 삶의 터가 되었다. 철도 개통으로 대전 인구는 급속히 늘었고 공장, 시장, 금융, 행정, 교육기관이 몰려들었다. 해방 직후 12만명이던 대전 인구는 1950년 한국전쟁 당시 100만명 이상으로 10배가량 늘었다.



어릴 적 대전역하면 생각나는 게 있다. 경부선에서 호남선으로 분기하느라 정차하는 5분 동안 열차에 급하게 뛰어내려 승강장에서 선채로 가락국수 한 그릇을 후루룩 흡입하던 추억이다. 이 기억 때문인지 대전은 여행의 목적지라기 보다는, 중간에 잠깐 쉬어가는 기착지라는 이미지가 강하게 남아 있다. 실제로 대전은 1993년 대전엑스포가 열려 반짝 관광객이 몰려들었지만, 이후 신도시처럼 콘크리트 건물 일색으로 개발돼 ‘노잼’(No+재미)의 도시가 돼 버렸다. 대전하면 ‘성심당 빵집’ 외에는 별 다르게 생각나는 먹거리도, 가볼만한 명소도 없는 도시라는 인식이 널리 퍼졌다.

● No잼 도시 대전? 소제동!

지난달 방영된 tvN의 예능프로그램 ‘서울촌놈’에서는 대전 출신인 골프선수 박세리, 배우 한다감, 개그맨 김준호 등이 출연해 차태현, 이승기와 함께 대전 곳곳을 둘러봤다. 이 프로그램의 주제도 역시 ‘대전은 노잼 도시인가?’였다. 한다감은 이 말을 반박하며 유서깊은 소제동의 골목길과 새로 생겨난 카페들을 소개했다.

소제동은 낡은 슈퍼와 철물점, 쌀집, 세탁소가 있는 30여개의 골목길로 이어진다. 서울 종로구 익선동 한옥마을에서 도심재생 사업을 주도했던 ‘익선다다’ 팀이 소제동의 옛 관사를 개조한 카페와 음식점 10여 개를 열면서 골목길이 변하기 시작했다.



좁은 골목길을 걷다보면 볼리비아의 우유니 소금 사막처럼 소금을 주제로 한 인테리어와 음식을 파는 식당, 로봇이 직접 드립커피를 추출하는 커피숍, 일본 온천을 모티브로 한 샤브샤브집, 하늘 높이 곧게 뻗은 대나무 숲에 둘러싸인 찻집 등 숨어 있는 맛집을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 곳에서는 지역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을 이용한 ‘로컬리즘’을 내세운다. 팬케이크 전문점 ‘볕’에서는 충남에서 생산된 밀가루를 사용하고, 레스토랑 ‘파운드’는 충청도 지역 기반 식자재로 요리를 한다. 서천김 페스토파스타, 예산 표고 트러플크림파스타, 금산 깻잎 리조토, 예산 꽈리고추 닭구이 등 충청도 지역에서 나는 농수산물로 메뉴를 구성했다.

여기에 대전의 청년문화재단인 ‘CNCITY마음에너지재단’이 후원하는 복합예술 문화행사인 ‘소제동 아트벨트’ 프로젝트도 진행됐다. 이 재단은 관사16호를 시작으로 마당집, 핑크집, 두충나무집 등 1920~30년대 지어진 관사를 활용해 전시와 공연을 할 수 있는 복합문화예술공간으로 만들었다.



‘관사16호’에 들어가 보면 근대시기 한국의 주거양식 변화를 확인할 수 있다. 안으로 들어서면 높은 천장, 드러난 서까래가 시선을 끈다. 실내로 처음 들어온 화장실, 온돌과 다다미를 사용한 방바닥 등 근대시기 한국의 주택 변화를 볼수 있다. 뒤로 연결된 대문을 나서면 또 다른 골목길로 이어진다.



소제동은 조선시대 우암 송시열(1607~1689)이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지도하던 소제호가 있던 곳이다. 우암은 별당인 기국정을 짓고 유림과 제자들에게 성리학을 강론했다. 소제호는 일제시대 매립되고, 일부 흔적이 대동천으로 남았다. 소제동 인근의 대동천변 산책길은 아늑하고 편안한 느낌을 준다.

● 근대문화의 거리 VS 아파트 재개발



관사촌의 일부는 지난 8월 문화재청에 근대 문화재등록 신청을 마쳤다. 풍뉴가와 관사 16호, 마당집, 두충나무집 등 4채다. 그러나 관사촌 밀집 구역이 아파트 재개발 사업에 포함돼 철거될 예정이어서 논란이 일고 있다.

힙한 거리로 뜨고 있는 서울 을지로와 성수동, 익선동 뿐 아니라 목포, 군산, 통영 등의 지방도시에서도 낡은 근대역사문화의 유산이 남아 있는 공간을 특색있는 문화의 거리로 꾸며 전국의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있다. 이러한 사례는 천편일률적인 아파트로 재개발하는 것보다 지역에 훨씬 더 높은 부동산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제 당시 적산가옥이 밀집돼 있는 군산에는 작년에 200만 명이 찾았다고 한다. 김경수 경남도지사는 통영시 도심 재개발의 벤치마킹을 위해 소제동 관사촌을 찾아와 견학하기도 했다.

건축가 유현준은 ‘로봇 커피숍’이 있는 소제동을 인근의 대덕연구단지와 연계된 IT, BT 기업타운으로 개발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대전역은 전국의 어디서든 1시간 이내에 찾아올 수 있다. 소제동은 그런 대전역에서 걸어서 5분이다. 게다가 대전에는 카이스트를 비롯한 많은 연구소의 우수한 두뇌들이 배후에 위치하고 있다. 소제동의 독특한 공간적 컨텍스트와 대전의 인재들이 합쳐진다면 차고 창업이 일어나는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스마트타운이 만들어질 수 있다.”

● ‘소제동 아트벨트 프로젝트’ 황인규 대표(CNCIY에너지 회장)

“대전이 철도와 함께 성장한 도시라는 점을 감안하면, 관사촌은 일제 강점기 역사가 아닌 ‘대전의 역사’와 정체성을 보여주는 공간입니다. 해방 이후에도 수십년간 대전 사람들이 살아온 생활 속 문화가 녹아 있는 현장이기 때문이죠.”



‘익선다다’와 함께 소제동 골목길을 문화예술복합공간으로 꾸미는 데 힘을 쓰고 있는 사람은 CNCITY에너지(전 충남도시가스)의 황인규 대표다. 도시가스는 대전의 땅밑에 회사의 전 자산이 묻혀 있다. 그래서 그는 대전이란 도시의 정체성과 미래에 대해 오랫동안 고민해왔다고 한다. 회사에 합류한 후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대전만의 오리지널리티(originality) 찾기. 그는 “검사생활하면서 여러 도시를 가보았는데, 도시마다 특산물, 특성이 있더라. 대전은 무엇일까 싶어서 거의 3년 동안 여기저기를 다녔다”고 설명했다.

서울대 법대를 나온 그는 검사가 되어 24년을 보내고 집안의 ‘가스사업’을 물려받았다. 작고한 대한도시가스의 창업자 황순필 회장이 선친이다. ‘소나기’의 황순원이 그의 큰 아버지이고 ‘즐거운 편지’의 시인 황동규가 사촌형이다. 이런 피가 흐른 탓일까. 그는 검사생활을 하면서도 합창단으로 활동하고, 파견근무를 하면서 문화를 접하는 일을 즐겼다. 황 대표는 “검사 생활도 의미 있지만 지역을 위해 뭔가 해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에 사직서를 내고 합류했다”고 밝혔다.



그가 대전의 오리지널리티로 손꼽은 곳은 대전 역사의 시작점인 철도와 근대건축물. 그는 목원대 건축학과 교수들과 대전 여러 곳을 찾아다녔다. 그러던 중 소제동 관사촌을 우연히 알게 됐다. “100여채까지 있던 관사가 현재 30여채 조금 넘게 남았어요. 소제동 옛 철도관사는 도시형성과 근대 생활문화가 층층이 쌓여 있는 ‘대전’이라는 도시 역사에 ‘켜’를 이루는 장소입니다. 이 장소와 건축물은 분명히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가질 수 밖에 없고, 지역에 커다란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CNCITY마음에너지재단이 추진한 첫 프로젝트는 관사촌을 전시공간으로 한 ‘소제동 아트벨트’ 프로젝트. 관사촌 16호를 시작으로 마당집, 핑크집, 두충나무집 등 이름을 정하고 각각의 특성을 살린 전시공간으로 조성했다. 관사촌을 문화시설로 활용하면 30여개의 소제동 골목길 특색을 살리면서 사람들이 찾고 즐기는 명소가 될 수 있다는 계획에서다. 그는 옛 충남도청, 동양척식주식회사 건물, 한남대 선교사촌 등 근대역사문화 공간을 전시와 음악을 위한 예술공간으로 꾸미는 작업도 추진하고 있다.

그는 “우리는 도시재생보다 새롭게 창조적인 공간을 만드는 것”이라며 “크리에이티브나 창의성은 다양한 공간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스토리는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젊은이들에게 아파트만 남겨주는 것이 좋을까? 대전의 미래와 후세를 위해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좋은지 늘 고민하며 살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전승훈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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