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플래시100]무위도식 ‘친일파 양로원’ 중추원을 폐하라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9월 19일 11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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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5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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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고통 받는 국민 모두에게 통신비 2만 원씩을 주겠다는 정부 여당의 방침에 반대 목소리가 높습니다. “퍼주기, 생색내기다”, “그 정도로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 같은 직관적 비난도 많지만 “예산 9300억 원을 독감백신 무료접종, 의료시설 확충 등 긴요한 곳에 쓰라”는 냉정한 비판이 더 설득력 있게 들립니다. 재원은 한정돼 있는데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사업에 지출을 강행하면 나라살림을 망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예산을 제 주머닛돈 빼 쓰듯 하는 걸로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만 했겠습니까. 본국의 대장성이나 의회만 신경 썼지 조선 내 비판은 안중에도 없었으니까요. 총독부의 자의적 예산집행 사례는 수없이 많지만 여기서는 중추원(中樞院)을 들어볼까 합니다. 그냥 중추원이라 하면 고려 때도, 조선 초기에도, 대한제국 때에도 같은 이름의 관청이 있었으니 ‘조선총독부 중추원’을 얘기한다는 점을 미리 일러둡니다.

1910년 설립돼 일제강점기 내내 존치됐던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2층 벽돌 건물. 원래 대한제국 시기 국가 재정을 맡아보던 탁지부의 증축 청사였지만 중추원이 전용했다. 현재 서울시 서소문별관 부근인 정동 1번지에 있었다.
1910년 설립돼 일제강점기 내내 존치됐던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2층 벽돌 건물. 원래 대한제국 시기 국가 재정을 맡아보던 탁지부의 증축 청사였지만 중추원이 전용했다. 현재 서울시 서소문별관 부근인 정동 1번지에 있었다.
중추원은 1910년 10월 1일 설치됐습니다. 구한말 중추원 명칭을 이어받아 대한제국 행정기구를 그대로 유지한다는 모양새를 취하고, 총독부 정무총감이 당연직으로 맡는 의장을 빼고는 부의장 이하 고문, 참의(초기에는 찬의·부찬의) 모두 조선인을 등용해 마치 조선민중의 의사를 표출할 수 있는 곳처럼 조작했습니다. 그러나 중추원은 대부분 일제의 조선 진출에 협력했지만 총독부 관직을 맡지 못한 대한제국 고관들로 채워졌습니다.

총독부 중추원 관제 제1조는 중추원의 목적을 ‘조선총독의 자순(諮詢·자문)에 응하는 바로 한다’라고 규정했습니다. 그러니 총독이 소집하지 않으면 모일 일도 없었고, 설령 의견을 제출한다 해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만인 허수아비 조직이었습니다. 실제 중추원 설립 이후 3·1운동 전까지는 회의도 거의 열리지 않았습니다. 대신 일본판 개천절인 기원절, 일왕 생일인 천장절 등 총독부 행사에 참가해 충성을 보이거나 이따금 총독의 훈시를 경청할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세간에서는 중추원을 ‘늙은 친일파를 구제하는 양로원’이라 했죠.

1930년대 중추원 회의 장면. 하는 일이 없어 ‘경로당’이라 불렸던 중추원은 1919년 3·1운동 이후에야 정례적인 회의를 열었다. 총독부는 주로 민의의 동향을 파악하고 원활한 통치정책을 펴는 통로로 중추원을 활용했다.
1930년대 중추원 회의 장면. 하는 일이 없어 ‘경로당’이라 불렸던 중추원은 1919년 3·1운동 이후에야 정례적인 회의를 열었다. 총독부는 주로 민의의 동향을 파악하고 원활한 통치정책을 펴는 통로로 중추원을 활용했다.
1920년대 동아일보에는 이보다 더한 표현도 많았습니다. ‘쓸모없는 물건’, ‘중추원(衆醜院·추한 무리들을 모은 관서)’이라 불렀고 중추원 참여자들을 ‘부육(腐肉·썩은 고기)에 붙는 자’라고 몰아붙였습니다. ‘횡설수설’에서는 정초 총독부 간부들에게 눈도장 찍으러 가는 중추원 인사들에 대해 ‘세배꾼 중 제일 이른 아침에, 제일 정성으로, 제일 바쁘게, 제일 오래 허리 굽히는 이가 중추원 대감들인데 1년 내내 놀고먹었으니 하루는 바빠야’라고 비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중추원에 들어가는 돈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총독부가 철저히 비밀에 부쳤지만 동아일보는 1922년 5월 11일자 1면 사설 ‘중추원을 단연코 폐지하라’에서 중추원 연간 운영비가 30만 원(현재가치로 약 30억 원) 이상이라는 취재결과를 내놓았습니다. 그해 총독부 총예산 1억5773만 원에 비하면 0.2%에 그치지만, 당시 수산행정 예산이 20만 원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입이 딱 벌어지는 금액입니다.

동아일보는 해당 사설에서 ‘보조금 수백만 원을 타내려 총독부가 (본국에) 머리를 조아려 애걸하는 이때, 쓸모없는 기관을 폐지해 그 비용을 유효한 시설에 돌리는 것이 최대 급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어 ‘중추원 하나를 희생하면 800개의 보통학교에 400명의 교원을 넉넉하게 늘릴 수 있고, 관립 고등보통학교 5개를 경영하고도 여유가 있을 것’이라는 대안까지 제시했습니다. 감정적, 정치적이 아닌 재정적 견지에서 중추원 폐지를 요구한 겁니다.

그렇지만 중추원은 일제가 패망하는 날까지 계속 남았고, 중추원 참의들은 일제 조선통치 정책의 변화에 따라 점차 농촌진흥운동, 황국신민화 같은 시정을 홍보하고 직접 순회강연을 다니기도 했습니다. 차라리 하는 일 없이 월급이나 축내던 때가 나았던 것 같아 씁쓸합니다.

정경준 기자 news91@donga.com

과거 기사의 원문과 현대문은 '동아플래시100' 사이트(https://www.donga.com/news/donga100)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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