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이 만드는 법]“700페이지 요리책에 왜 사진 한장 없냐고요?”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7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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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 이탈리아…’ 편집자 서성진

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2001년 미국 정치드라마 ‘웨스트 윙’ 시즌2 17편에서 70대 상원의원이 건강보험법안 처리를 막으려고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를 한다. 이 의원이 8시간째 단상에서 읽는 것은 두꺼운 요리책이다. 새우튀김 요리법을 읊는 장면이 잠시 비친다.

요리책은 독서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실용서다. 완성된 음식을 접시에 먹음직스럽게 담은 사진이 있고, 조리 순서별 사진을 곁들인 것도 있다. 그런데 요리 사진은 아예 없고 700쪽 분량에 450여 가지 요리법을 담은 책이 있다. ‘정통 이탈리아 요리의 정수’(마르첼라 하잔 지음·박혜인 옮김·마티)다.

서성진 편집자(35·사진)를 비롯해 인문예술 서적을 주로 내온 출판사 마티 사람들은 이 책대로 하면 집에서도 매끄럽게 만들 수 있는지 직접 몇 가지를 요리해봤다.

“대표 요리법이 양파 토마토 버터만 넣는 토마토소스, 몸통에 레몬만 넣고 굽는 로스트치킨, 우유에 조린 돼지고기 등심인데 이 중 토마토소스, 로스트치킨하고 파스타, 시금치 수프 등을 만들어 먹어보고는 ‘괜찮다, 이거’ 했지요.”

완성품 사진이 없으니 스스로 만들고서 ‘이 비주얼이면 괜찮은 건가’ 의구심도 들지만 먹어봤을 때 “괜찮잖아!”라며 만족할 수 있단다.

지난달 30일 서울 종로구 카페 이마에서 만난 서 편집자는 “기존 요리책에는 조명도 환하고 더 번지르르하게 나오게 기름을 발라 찍는 요리 사진이 있지만 집에서 하면 절대 그런 비주얼이 안 나와 좌절감만 느낀다”고 말했다. 이 책은 그렇지 않다는 얘기다.

이탈리아 요리의 성경으로 불리는 ‘실버스푼’이 이탈리아에 사는 이탈리아인을 위한 책이라면 ‘정통 이탈리아…’는 비(非)이탈리아인을 위한 이탈리아 요리책의 최고봉으로 꼽힌다.

“미국에 살던 저자가 이탈리아말로 쓴 요리법을 미국인 남편이 영어로 옮겨 적었대요. 요리 초보인 배우자가 기초적인 것까지 물어봐서 그런지 내용이 자세해요.”

저자(1924∼2013)는 이탈리아에서 이 요리를 언제 왜 먹는지, 고향 또는 아버지 등 함께 먹었던 사람과 공간의 추억을 군데군데 넣어 읽는 맛도 난다. 밑줄을 쳐가며 읽을 만한 대목이 적지 않다. ‘밤은 겨울에 구하면 좋다’가 아니라 ‘밤을 구할 수 있는 절호의 시기는 낮이 짧고 밤은 길며 차가울 때’라는 식이다.

저자는 책에서 “창조적이며 놀라운 맛을 내려고 쓴 것이 아니다. 읽은 사람들을 안심시키려고 썼다”고 말한다. 그만큼 서민적이고 보편적이라는 뜻일 게다. 서 편집자는 “완벽한 맛은 아니지만 내 입맛에 간이 맞고 ‘한 끼, 잘 해먹었다’ 정도로 요리할 수 있으니 ‘안심이 된다’는 말이 딱 맞는다”고 했다.

해외에서는 이 책의 모든 요리를 해먹어보겠다며 도전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모를 일이다. 이 책의 요리법을 유튜브에서 누가 실연해 보일는지.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정통 이탈리아 요리의 정수#서성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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