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보 100주년 ‘동감_백년인연’
검안 후 진실 증언한 오연상 원장
6월 민주화운동 도화선으로, 고교생 때는 동아일보에 격려광고
“윤상삼 동아일보 기자(1957∼1999)가 마지막에 ‘조사실 바닥에 물기가 있었느냐’고 묻기에 그렇다고 답했더니 그대로 신문에 실리더군요.”
1987년 박종철 열사를 검안했던 오연상 원장(63·오연상내과)은 그해 1월 15일 근무하던 중앙대용산병원 진료실에 찾아온 윤 기자를 떠올렸다. 오 원장은 당시 윤 기자에게 경찰의 물고문을 강력하게 시사하는 증언을 했고, 동아일보가 이를 보도하면서 ‘탁 하고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경찰의 거짓말은 설 자리를 잃었다. 이로써 6월 민주항쟁의 서막이 올랐다.
동아일보는 창간 100주년을 맞아 소중한 인연을 맺은 이들에게 감사를 표하는 ‘동감_백년 인연’의 일환으로 오 원장에 대한 감사 행사를 30일 열었다. 오 원장은 1987년 당시 언론 보도 등이 전시된 서울 종로구 신문박물관을 둘러봤다.
당시 박 열사의 시신을 검안한 뒤 오 원장은 기자들 앞에서 “복부 팽만이 심했으며, 폐에서 수포음(水泡音)이 들렸다”고 증언했다. 오 원장은 이날 “의학적으로는 수포음이 물고문과 직접 관계있는 건 아니지만 일반인에게는 물고문을 연상시키는 데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하고 했던 말이었다”고 회고했다.
임채청 동아일보 부사장은 본보가 오 원장을 1987년 12월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던 지면과 오 원장의 과거 사진이 담긴 액자, 창간 100주년 기념 오브제 ‘동아백년 파랑새’ 등을 증정했다.
오 원장이 고교 3학년 시절 유신정권의 언론 탄압을 겪던 동아일보에 낸 격려광고도 액자에 담았다. 이 격려광고 문구는 ‘둔마(鈍馬)의 채찍은 국민이!’, 명의는 ‘중앙고 광고 낸 반’이었다. 오 원장은 “‘중앙고 3학년 7반’이라고 내려다가 혹여 담임선생님이 고초를 겪을까 걱정돼 익명으로 했다”고 회고했다. 본보는 당시 격려광고를 냈던 시민들에게 제공한 기념 메달을 복원해 오 원장에게 선물했다.
유심히 신문박물관의 여러 전시물을 관람하던 오 원장의 발걸음이 1987년 1월 19일자 동아일보 지면 앞에서 멈췄다. 1면 톱 제목은 ‘물고문 도중 질식사’. 동아일보가 6개 면을 고문 관련 고발 기사로 가득 채운 날이었다. 오 원장은 “저 날의 신문이 계속 머릿속에 남았다”고 했다. 이후 본보는 대대적인 고문 추방 캠페인을 벌이는 한편 사건의 축소 은폐 조작을 고발했다.
“내가 박종철 열사를 살렸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게 (죄책감이) 커요. 그 일에 관해서는 의사로서 실패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해 6월 29일까지 사태는 수많은 우연들이 거의 기적처럼 진행됐고, 그분의 죽음은 우리나라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사람들의 순수한 의지가 모였기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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