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에서 온 페미니스트’ 래퍼 슬릭 “페미니즘 인정 않으면 나의 공격대상”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7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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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옥에서 온 페미니스트.’

래퍼 슬릭(본명 김령화·27)은 이 한마디로 한국 힙합에서 가장 뜨거운 인물이 됐다.

‘여긴 아직도 기집애 같다는 말을 욕으로 한다면서/아직도 게이 같다는 말을 욕으로 한다면서… 그게 힙합이라고 하면 나는 오늘부터 힙합 관둠.’(2016년 슬릭 프리스타일 랩 중)

미투와 백래시(역풍) 논란, 성소수자 인권과 워마드 관련 이슈가 사회를 떠들썩하게 하는 가운데 슬릭이 생각났다. 작은 체구에 짧게 자른 머리. 최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만난 슬릭의 인상은 조금은 선한 소년 같다. 그러나 그의 입이 열리면 얘기는 달라진다. 거침없이 신념을 말하는 그의 입담은 미트를 찢어발길 듯한 굉음을 내며 직구처럼 쏟아졌다.
래퍼 슬릭은 “페미니즘을 알게 된다는 건 영화 ‘매트릭스’에서 빨간 약을 먹은 것과 같다. 전처럼 세상을 바라볼 수 없다”고 했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래퍼 슬릭은 “페미니즘을 알게 된다는 건 영화 ‘매트릭스’에서 빨간 약을 먹은 것과 같다. 전처럼 세상을 바라볼 수 없다”고 했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 ‘(나는) hella fuckin feminist/Do it for ma girls 맨 앞에 서 있어’(‘36.7’ 중)

“첨엔 케이블 채널에 나온 래퍼를 보고 기존 가요와 다른 이야기를 한다는 게 맘에 들었어요. 거리 공연을 찾아다니거나 혼자 공책에 랩 가사를 써보기 시작했죠.”

중학생 때 랩을 시작했다. 여성 힙합 커뮤니티에 들어간 뒤 홍대입구역 3번 출구에서 “길바닥에 앰프 하나 놓고 친구와 한 랩 듀오 공연”이 첫 무대. 경희대에서 언론정보학을 전공하며 흑인 음악에 심취했다. 힙합 사이트에 올린 습작이 유명 래퍼들의 찬사를 받으면서 수면 위로 올라왔다.

페미니즘은 어느 날 폭풍처럼 밀려와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꿨다. “2015년 메르스 사태 때였어요. 메갈리아 사이트가 궁금해 들어갔다가 페미니즘 관련 책 추천 목록을 접했죠.” 대학 도서관에서 우에노 지즈코의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를 대출했고 책을 읽다 충격 속에 밤을 꼴딱 새웠다. “오전 9시에야 책장을 덮고 누웠는데 잠이 안 오더라고요. 남성 간의 연대를 위해 필요했던 외부의 적이 여성이었고 여성조차도 여성 혐오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이야기…. 똑똑한 맛에 산 제가 실은 바보였던 거죠.”

○ ‘가끔 거울 앞에서 묻곤 해/Am I a question?’(‘AIQ’ 중)

“비유가 기술적으로 아무리 참신하다 해도 그게 구린 생각에서 나왔다면 그건 그냥 구린 거예요. 힙합에서 통용되는 말 중에 ‘골드 디거(gold digger)’가 있어요. 돈을 좇아 자기 몸을 팔 수도 있는 여성. ‘내가 랩을 잘해 돈을 버니 여자들이 날 쫓아다니지’ 같은 가사….”

‘워마드’ 논란에 대해 슬릭은 “페미니즘을 생물학적 여성에 한정한다는 건 공정하지 못하다”면서도 “표현 방식이 온건했으면 좋겠다는 말은 ‘권력자인 나의 기분이 나쁘니 말 예쁘게 하라’는 것에 불과하다”고 일축했다.

슬릭은 얼마 전 서울 퀴어 퍼레이드에도 참여했다. “문란하지 않아요. 제가 더 음란하다고 생각하는 건 거리 물총축제예요. 동성 간의 성행위를 상징하는 것이 음란하다면 이성 간의 성행위 표현은 안 문란한가요.”

슬릭은 5월 말, 8곡이 담긴 2집 ‘LIFE MINUS F IS LIE’를 냈다. ‘36.7’은 한국 여성 노동자의 임금이 남성보다 36.7% 적다는 데서 착안했다. “저에게 F는 당연히 페미니즘이에요. 2집의 메시지를 요약하면 이거예요. ‘내가 새로 알게 된 세상이 있는데, 그건 내가 태어날 때부터 가진 무력감과 슬픔의 원인이었어. 여전히 슬프지만 난 이제 알아.’”

그는 “페미니즘이 말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전부 다 내 디스 대상”이라고 했다. 강경한 발언과 태도는 그의 주변에 팬과 안티를 모두 끓게 했다. 그의 기사나 음원 밑에는 ‘#우리는_서로의_용기다’란 응원의 댓글이 달리는가 하면 악평을 달고 ‘별점 테러’를 하는 이들도 존재한다.

“제가 가는 길을 보고 ‘저런 길도 있구나’ 하고 알게 된 사람들이 많아서 뿌듯해요. ‘헛짓은 아니었구나. 하다 만 몸부림은 아니었구나’ 생각하게 돼요.”

슬릭은 다만 요즘 조금 외롭다고 했다. 비슷한 생각과 음악을 공유할 여성 음악인들과 연대해 창작 집단을 만들고 싶다고. “제 소셜네트워크서비스 계정으로 쪽지 주세요. 지금 제게 필요한 건 주고받는 것, 그러니까 핑퐁이에요.”

그는 마지막으로 이 기사에 첨부된 동아닷컴 동영상을 통해 한 편의 무반주 신작 랩을 공개한다. 페미니즘과 그것을 욕보이는 것들에 대한 단상을 담은 짧은 운문이다.

임희윤 기자 imi@donga.com
#슬릭#페미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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